100가지 단상|지우고 싶은 기억
1980년대 중반인 고등학생 때 극과 극인 담임 선생님을 겪었다. 고2 때는 최악, 고3 때는 최고였다. 그때의 기억은 3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생생하다. 심한 트라우마와 그 트라우마를 치유했던 시간들.
고2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믿기 어렵겠지만, 오락부장이었던 나는 버스 안에서 즉석 '노가바'를 만들어 불렀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살듯이~" 당시 (강제) 야간자율학습을 시키는 학교를 꼬집어 "~유치원" 후렴구를 "~교도소"라고 바꿔놓았다. 내가 선창하면 애들은 신나서 따라불렀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지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담임이 종례를 마친 뒤 내 이름을 부르며 교무실로 내려오라고 했다. 교무실에 내려갔더니, 졸다가 깬 담임은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내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묻는다. 이미 가정환경조사서를 써서 냈기 때문에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 어디서 누구랑 사나?
"○○동 ○○아파트 이모집 옆에서 삽니다."
- 부모님은 뭐하시나?
"아버지는 (중2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경기도 ○○에 계십니다."
- 그럼 부모랑 안 사는 거네. 이모부는 뭐하시나?
"○○○시장에서 수입제품 장사를 하십니다."
(다시한번 나를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한번 훑어보더니) 그러니까, 니가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니까, 그렇게 학교를 씹고 다니는 노래나 부르고 애들을 선동하는 거 아니야, 새끼야. 호로자식이니까 그런 거지...
교무실 담임 주변에는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들도 몇 분이 계셨고, 그 소리를 다 들었다. 그렇게 악몽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는 그 감옥에서 풀려났다. 교무실 밖으로 나오자 다리에 힘이 풀렸고 멍했다. 때마침 지나가던 반 친구를 껴앉고 몇 분 동안 엉엉 울었다.
지금까지 내 가슴에 박힌 대못의 상처가 다 아물지는 않았다. 내가 아버지를 죽인 것도 아니고, 뇌졸중으로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그게 왜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일일까. 노가바가 잘못됐다면, 그걸 야단치면 되는 거 아닌가.
그 후 나는 담임에게 일부러 반항했다. 야간자율학습을 '째는' 건 기본이었다. 가끔씩 친한 애들을 꼬셔서 동시상영 영화관도 전전하고, 공부와 거리를 뒀다. 성적은 계속 떨어졌고, 담임이 야자 감독일 때는 일부러 보란듯이 학교를 탈출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교단으로 불려나가 따귀를 몇 대 맞고, 운동장을 몇 바퀴 돌았다. 그렇게 맞은 따귀는 아프지 않았고, 운동장을 돌 때는 쾌감마저 느껴졌다. '그래, 더 해봐'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고2 생활의 2/3를 그렇게 담임과 불화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듬해인 고3 때는 정반대의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내 인생에서 최고로 기억되는 스승이었다.
악몽 같은 고2 생활이 다 지나갔다. 이제는 고3인데, 나사 풀어놓은 듯 지낸 관성이 몸에 남아 있었다. 고2 담임은 역사, 고3 담임은 영어 전공이었다.
고3 반 배정을 받은 뒤 담임 선생님과 첫 만남. 작지만 다부진 체격, 부드러운 표정이지만 만만해보이지 않는 인상. 고3 담임 쌤의 인사 첫 마디는 의외였다.
"앞으로 너희의 고등학교 마지막 일년을 함께 보낼 김○○이다. 나를 형처럼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나도 너희를 동생처럼 대해줄테니..."
형이라고 여기기에는 나이 터울이 많았지만, 그래도 첫 인사가 맘에 들었다. 고3 담임 쌤의 말은 진짜였다. 고3 생활을 하면서, 담임 쌤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화내는 걸 보지 못했고, 소위 문제아(?)라고 불리는 뒷번호 아이들에게조차 손찌검하는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정 형편이나 성적으로 아이들을 차별하는 느낌을 1도 받지 않았다. 뒷번호 아이들이 말썽을 부릴 때면 그저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부드럽게 잘못을 지적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 1년 내내 일관된 태도였다.
고3 담임 쌤의 진정성에 감동한 나는, 그에게 보답하는 길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고2 때와는 정반대였다. 고3 기간 내내 야간자율학습을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야자가 시작되면 책상을 교단 앞으로 가져가 칠판 벽에 붙여놓고, 최대한 집중했다. '精神一到 何事不成' 야자 시작 전 칠판에 이렇게 써놓는 나만의 의식도 빼놓지 않았다. 담임 쌤에게 잘 보여 칭찬 받으려는 마음이 컸던 게 사실이다.
꾸준히 떨어진 성적은 한꺼번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노력한만큼 비례했다. 1학기보다는 2학기 때, 2학기도 중간고사 때보다는 기말고사 때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런 와중에도 고2 때처럼 반 아이들에게 3000원씩 걷어 자발적으로 반 문집을 만들었다. 담임 쌤은 문집이 나온 뒤에야 알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일년 동안 '고3병'을 크게 앓지 않고 지냈던 건 전적으로 담임 쌤에 대한 신뢰와 믿음 때문이었다. 쌤은 늘 나에게 "한기야, 너라면 할 수 있어"라며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소위 SKY 대학에 많이 보내면 담임이 평점도 좋아지고, 성과급도 받는 사립학교였다. 그래서 대입시험이 끝나면, 고3 담임은 대개 성적이 괜찮은 학생들에게 학과 기대치를 낮추고 SKY에 가라고 꼬시거나 강권했다.
그런 분위기에서도 담임 쌤은, 내 스스로 가고싶은 대학을 결정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두 시간은 기본인 진로사정을 난 10분도 채 안 걸려 마쳤다. 담임 쌤이 내게 얘기한 건 딱 하나.
"네가 어떤 대학 원서를 가져오더라도 사인해줄게."
담임 쌤은 실제로 내가 가져간 원서에 즉시 사인해줬다. 다만, 학과만 연필로 '국어국문학과'라고 적은 뒤, 나중에 너가 다른 과를 원하면 고쳐쓰라고 했을 뿐. 다른 곳보다 빨리 시험보고, 빨리 결과를 발표한 대학에 원서를 낸 덕분에 담임 쌤에게 첫 합격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뛸듯이 기뻐하고,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