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특한 한 신체적 결점이 있다. 발등이 높고 발의 볼이 넓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발 때문에 불편했던 기억이 없었고, 형제 중 나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인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그런 단점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닌 것 같다. 추측하건대 오랫동안 즐겨하던 운동 때문일 것이다. 요즘에야 산책이나 트래킹 위주의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지만, 발이 굵어진 것은 아마도 20여 년 계속된 사회인 축구(구, 조기 축구)의 영향일 것이다. (2020년 3월 상대 팀 선수와 부딪혀 그만 그 선수가 크게 다쳤다. 그 후로 나는 조기 축구계를 떠났다.)
업무상 구두를 신고 다녀야 하는 나에게 두꺼운 발은 나를 톡톡히 불편하게 한다. 구입하는 신발마다 발에 잘 맞은 적이 드물기 때문이다. 발에 잘 맞는 모델이 있으면 나는 그 구두를 두세 번 더 연속적으로 구매하기도 한다. 발등 부분에 끈이 없는 신발은 신어 볼 수도 없다. 끈이 없는 신발은 발등 부분에 여유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인터넷으로 구매를 할 수 없는 것도 불편한 일상이다. 신발 종류가 넘쳐난다는 동대문시장에서조차 맞는 신발을 찾지 못한 적도 있었다. 구두를 사기 위해서는 발품을 팔아 여러 상점을 돌아다니거나 평상시에 쇼핑몰을 돌아다닐 때도 신발을 눈여겨봐야 한다. 맞춤 구두를 사면 구두 구입 문제는 해결될 테지만 고가의 부담이 있고, 디자인적 선택의 폭도 좁다.
이런 상황으로 나만의 신발의 구입 방식이 생겨났다. 구두가 265mm의 신발보다 크면 발이 신체에 비해 너무 커 보이기 때문에 그 이상을 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그 다음엔 신발을 신고 몇 걸음을 걸어본 후 착용감에 큰 문제가 없으면 그때야 지갑을 연다. 구두를 사 들고 왔다고 해서 바로 신발을 착용하는 것은 아니다. 새 구두를 바로 신고 다니다가 발가락이나 발등에 심한 상처가 생겨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신발을 사무실에 놓고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 달 정도를 신고 벋기를 반복하며 길을 들인다. 사무실 구석에는 언제나 출격을 대비하여 훈련 중인 한두 켤레의 구두가 있다. 그 구두는 슬리퍼 대신 실내화의 기능도 겸한다. 가죽에 주름이 가고 착용이 편안해지면 비로소 밖으로 나가 맨땅을 밟아본다. 그렇게 길을 들여놓아도 열흘 정도는 밖에서 훈련을 추가로 시켜야 한다. 구두는 그렇게 나와 정이 든다.
혹시라도 많이 걷는 날이 예상되거나 술자리라도 있는 날이면 구두 대신 운동화나 트래킹화를 신고 나간다. 비나 눈이 오는 날도 마찬가지이다. 구두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하고 구두에도 휴식을 주기 위해서다. 운동화처럼 물로 세탁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신발 안쪽을 청소한다. 먼지만 제거해 주더라도 청결과 동시에 습기가 차는 것까지도 방지할 수 있다.
뒷굽이 달고 빗물이 스며들면 나와 인생길을 같이 한 정든 구두를 떠나보낼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정이 들어 생긴 미련은 헌 구두를 신발장에 머물게 한다. 신을 수 없는 구두를 보관한다고 아내의 잔소리를 듣곤 하지만, 나는 구두에 대한 미련이 희미해질 때까지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다가 낡은 구두가 숨을 잃었다 싶으면 밑바닥을 맞대도록 묶어 우체통에 편지를 넣듯 의류 수거함에 떨군다. 어느 곳으로 부쳐질지 모르지만 잘 쓰일 것이라는 마음도 빼놓지 않고 보낸다. 굳어버린 미련도 옆에 두고 돌아선다. 아픈 미련이 따라올까 봐 돌아오는 골목길에 쓸쓸함을 던지며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