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의 수연산방을 찾았습니다. 한성대입구역에서 20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지만, 근대의 건물과 전시관과 오래된 상점들이 있어 8, 90년대의 시간여행을 하며 걸을 수 있는 곳입니다. 골목이 좁아지자 수연산방이 나타났습니다.
수연산방(壽硯山房)은 벼루가 달아 없어질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의미로 소설 “달방”을 쓴 이태준 선생이 지은 당호입니다. 1904년 철원 금학산 아래서 태어난 그는 을사조약에 반대하던 아버지의 러시아 망명길을 따릅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그의 나이 6세 때 아버지가 소천하십니다. 다시 어머니를 따라 북녘의 이진이라는 곳으로 귀국하지만 9세 때 어머니마저 하늘로 떠나십니다. 곧바로 철원의 당숙집에 위탁이 되지만 그들은 이태준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홀대를 견뎌야만 했죠.
배재학당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입학하지 못합니다. 중앙고보에 입학시험을 치러가는 길에 휘문고보의 시험 시작 종소리를 듣고 휘문고보에 가서 시험을 치는데, 두 곳에 원서를 넣은 상태여서 중앙고보를 선택하려 했으나 늦잠을 자는 바람에 먼 곳인 중앙고보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휘문고보 시절 이병기 선생에게 "부여행"이라는 기행문이 1등으로 뽑힙니다. 휘문보고의 비리에 저항하기 위해 동맹 휴학에 참여하다가 제적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공기만 먹고 살았다고 표현될 만큼 궁핍한 삶을 삽니다. 극도의 힘든 생활에서 문학을 놓지 않은 그는 도쿄에서 썼던 "오몽녀"가 조선문단에 입선되면서 문단활동을 하게 됩니다.
수연산방은 이태준 선생이 1930년대부터 살던 집입니다. 1932년에 “달밤”을 출간하였습니다. “달밤”은 신문보조배달원 황수건이 이사 온지 며칠 되지 않은 시골스런 성북동집에 신문을 들고 찾아오면서 시작됩니다. 아마도 이 집이 소설의 배경으로 보입니다. 1930년 결혼을 하였고 신혼집은 서대문 근처였는데 곧 성북동에 터를 옮긴 것 같습니다.
선생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한 후 1946년 월북을 하게 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1958년 이항구 작가는 북한의 함흥에서 벽돌공장의 뒷마당에서 파철을 수집하는 한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사내를 목격합니다. 그 후 1969년 강원도 장동탄광(북한)에서 그의 부부가 목격됩니다. 그것이 이태준 선생에 대한 마지막 목격담입니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연산방은 선생의 외증손녀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찻집으로 변한 그의 집에서 볕든 오후를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