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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차중 Nov 21. 2024

가을을 모아둔 곳, 신성리 갈대밭

채만식 소설의 <탁류>는 금강을 배경으로 한다. 전북 장수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충청도를 비집고 들어와 논산 강경을 시작으로 충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룬다. 논산부터 황토를 머금은 강물은 점점 붉은 흙색으로 변해간다. 강물의 붉은 빛이 완성되는 곳, 그곳은 황토의 강과 누런 들녘 그리고 짙은 갈색의 갈대와 물보라처럼 피어오르는 억새가 춤추는 곳이다.


일행과 함께 서천에 도착했다. 친구들이 잔뜩 모여 사는 익산과 금강을 경계로 마주 보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찾은 횟수는 적지 않다. 그러나 잠시 멈췄다 갔을 뿐 풍경을 즐긴다거나 가을을 느낀 적은 없었다. 마침 오늘은 바람도 가을바람도 서늘하고 신간까지 편한 날이다. 서천의 가을풍경에서 오랜 시간 머물러야겠다.


이번 서천 여행의 첫 마을은 옥포리다. 오래된 우체국을 지나 마을을 가로질러 토성처럼 쌓인 제방을 올랐다. 사람이 살 듯 말 듯 한 집이 제방을 담으로 삼고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자리를 틀었다. 금강이 흐른다. 동쪽으로 자전거 길이 길게 나 있고, 서쪽 하구둑부터는 군산이 시작된다. 강 건너 전북의 웅포면이 마주한다. 주인 없는 감나무에 감이 탐스럽게 열렸다. 새의 몫이라 생각하고 열매에 손을 데지 않았다. 사진으로 풍경만 담아갈 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노부부도 부푼 가을빛에 미소를 건넬 뿐이다. 이곳의 가을은 유난히 길게 스미다 갈 것 같다.


우체국 앞 ‘우어’로 만든 요리를 파는 식당이 있다. 금강 주변에 꼭 있어야만 하는 이름 “금강식당”이다. 이곳이 나의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아주 가느다란 기억으로 회상되는 물고기 이름이다. 우어는 ‘웅어’의 이곳 사투리이다. 아마도 갈대숲에서 자라 붙여진 위어(葦魚)라는 이름이 변형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인데 산란기에 강으로 거슬러 오르는 회유성 어류다. 낮은 물의 갈대숲에 고기들이 모여 산다고 하는데 갈대로 유명한 신성리 일대가 그들의 주요 서식지가 아닐 수 없다. 맞은편 “웅포”가 웅어의 웅일까? 한자는 곰웅(熊)으로 같지만 그런데 웅포는 우리말로 “곰개나루”이다. 그럼 웅포에서 많이 잡혀서 웅어일까? 웅어에 대해 별생각을 다 해본다. 자료에는 웅포가 곰이 금강의 물을 마시는 듯한 지형이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잘 차려진 식사를 마치고 신성리로 향했다. 누런 들녘과 하얀 스카프처럼 살랑거리는 억새꽃의 풍경이 벌써 나의 가을 모습을 찾아 나선 목적을 채워버렸다. 신성리 갈대밭은 영화 JSA 촬영지로 한때 유명한 곳이었다.


평일인데도 가을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많다. 강둑에 올라섰다. 갈대밭 사이로 사람들이 꽃잎처럼 흘러 다닌다. 황금빛 강에는 윈드서핑 보드가 떠다닌다. 이곳은 물의 길이며 바람의 길이며 철새들의 길이다. 작년 겨울 이곳에서 강을 따라 수만 마리의 가창오리 떼가 집으로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올겨울 오리가 강에 가득한 날을 찾아 가창오리 떼의 군무를 사진으로 담을 것이다.

신성리 갈대밭은 강을 따라 200m의 너비로 1.5km만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전체 갈대밭의 2%밖에 되지 않지만 전체 길을 걸으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릴 것이다. 자연보호를 위해 최소한의 영역을 사람들에게 개방했다. 최소한이라지만 걷기에 너무 넓다.


바람이 갈대와 억새를 스치고 지나온 길을 만든다. 다시 부는 바람이 그 길을 지우는가 싶더니 또 다른 문양을 그리고 간다. 먼저 온 기러기 무리가 하늘에 날아다닌다. 데크의 난간은 보표가 되고 거기에 덧대어 사람들이 음표로 걸어 다닌다. 보는 것만으로 음악이 흐르는 듯하다.


한팀의 여성들이 사진을 부탁한다. 아마도 커다란 카메라 덕에 누가 보아도 전문 사진사처럼 보였을 것이다. 생각보다 사진이 잘 찍혔다. 사진을 보고 하얀 억새처럼 즐거워한다. 누가 촬영해도 어떤 것이 피사체가 되어도 회색빛 억새가 모든 색채를 돋보이게 한다.


나무에 오른 기러기 한 마리가 이정표 위에 앉았다. ‘갈대 문학 길’, ‘영화 테마 길’, ‘금빛 물결 마당’의 갈래 길이다. 전망대에 올라선 것만으로도 모든 풍경을 볼 수 있다. 모든 길을 걸어 가을의 감성을 덤으로 가져가야겠다.

https://youtu.be/nd9TN2UPwF0?si=hPP6qAbtAcR0mv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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