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도덕을 앞 선 과학
우리나라 사람들은 '줄기세포'라는 단어에 익숙하다. 한때 세계와 나라를 들썩였던 황우석 사태 때문이었다. 복제소 '영롱이'로 유명했던 황우석 교수는 2004년 '사이언스'지에 세계 최초로 인간체세포를 복제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그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정부와 언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대한민국을 이끌 새로운 지식인으로 대우받았으며 영웅으로까지 대접받아 위인전이 나오기도 했다. 국민들은 황우석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를 신뢰하는 건 광신도급이었으며 황우석 교수 본인도 교주와 다름이 없었다. 그야말로 최전성기였다. 하지만 나에게 줄기세포와 황우석에 관한 기억은 흐릿하다. 물론 그가 누군지, 뭘 하는 사람인지는 알았으나 당시 어린 나는 줄기세포보다 레벨업이 더 중요했다. TV에서 쉴 새 없이 나오는 교수님보단 모니터 안의 게임이 훨씬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그를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 날이 온다.
2005년 말 시사프로였던 PD수첩의 폭로 보고가 방영됐다. 원래 좋은 소식보단 나쁜 소식이, 영광의 순간보단 몰락의 과정이 더 흥미롭다. 폭로 보고가 나간 뒤, 정치권과 언론, 국민들 할거 없이 나라가 반으로 나뉘어 그에 대해 설전을 벌였다. 그 뒤 연구에 사용됐던 난자의 불법채취를 시작으로 논문은 표절로 점철되어 있었으며 복제했다던 배아줄기세포조차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의 명성은 끝을 모르고 추락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초창기 황우석 교수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복제소 '영롱이'조차 논문은커녕 연구노트조차 없다고 했다. 게다가 관련 자료들도 이사 중 소실됐다고 했다. 진짜로 복제에 성공했는지 아님 어디 우시장에서 임신한 암소 하나 사 온 것인지 진실은 황우석 교수만이 알 듯싶다.
이처럼 과학은 혁신과 진보를 위한 중요한 도구지만 종종 혁신적인 연구의 발견과 윤리적인 갈등도 함께 발생한다. 황우석 박사 사태는 혁신과 진보를 위한 중요한 도구가 잘못 사용됐을 때의 윤리적인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는 이런 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하여 윤리적인 경계와 고민을 조명하는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다. 과학을 위해서라면 불법이든, 거짓말이든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생각이 물밑에 깔려있었기에 이런 작금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온 나라를 흔들었던 사태 이후 약 18년이 지났다.
얼마 전 줄기세포로 인간배아에 성공했다는 뉴스 기사를 봤다. 좋은 글거리가 될 것 같아 본 칼럼의 작성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줄기세포라 하면 황우석 교수를 때어놓고 말할 수 없어 관련 정보를 찾아보고 서론을 작성하던 중, 타이밍 좋게 지난 23일 넷플릭스에서 황우석 박사의 다큐인 '킹 오브 클론'이 올라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야말로 신풍이 아닐까. 어쨌든 본 칼럼을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1시간 반의 다큐를 다 보았다. 다큐는 황우석 교수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교차시켜 보여줬다. 원래는 과학적 진보와 기술의 발전, 그리고 현 상황이 칼럼의 원 주제였지만, 다큐를 보며 내가 간과하고 있던 과학의 다른 이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원 주제를 다루며 낙관적 미래를 앞세운 과학으로부터 뒤처진 윤리와 도덕, 그 경계에 대해서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칼럼이 되었으면 좋겠다.
임신의 30% 첫 주에 실패한다. 과학자들은 이런 실패의 원인과 임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연구해 왔지만 연구를 진행하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이런 연구의 모델이 실제 인간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과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간 배아는 유산이나 낙태에서 채취한 표본이었기에 확보하기도 어려웠고 불규칙했다. 그러던 며칠 전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정자와 난자 없이 합성 인간배아를 형성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물론 인공 배아가 실제 인간 배아의 완전한 카피는 아니지만 인공 배아 모델이 실제 배아와 발달 과정이 같다면 실제 배아를 쓰지 않고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실제 인간 배아보다 채취가 쉽고 제약이 없다는 것에서 대규모 실험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한편으론 논란도 커졌다. 이 연구가 계속 발전한다면 실제 태아처럼 장기가 형성되는 '무엇'인가가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줄기세포로 만들어진 합성 배아의 경우 이를 규제하는 법률이나 가이드라인이 아직 없다. 물론 합성 배아가 실제 인간이 될 가능성은 없고, 기술도 충분치 않지만 무작정 불가능하다고 치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처럼 인공배아 연구는 큰 관심과 논란을 일으키며, 생명과학과 의학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동시에 이러한 혁신은 윤리적인 고민과 논의 또한 유발한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며 인간들의 생활은 더 윤택해졌지만 자연스레 따라왔어야 할 도덕적인 고민과 관념은 뒤서게 됐다. 왜 항상 윤리와 도덕이 과학을 앞서지 못하는가에 따른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번째, 현대 사회가 기술 중심의 사회로 발전했기 때문. 과학기술은 우리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고, 사회와 경제를 넘어 국가의 존속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높아졌으며, 사람들은 기술의 혜택과 성과를 강조하면서 윤리적 고민과 도덕적 책임을 뒤로 미뤄두게 됐다.
두번째,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했기 때문. 이것은 시간적 차이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활용되는 것은 비교적 짧은 시간이 걸리는 반면, 해당 기술의 윤리적인 영향과 도덕적 책임에 대한 평가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논의가 끝나도 관련된 법 제정이나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과정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세번째, 문화와 윤리의 다양성 때문. 문화적인 차이와 윤리적 다양성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연구에 관한 공통된 윤리적 기준을 찾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세계는 서로 다른 역사, 가치관, 전통, 종교, 사회체제 등을 갖고 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다양한 윤리적 가치와 도덕적 규범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차이가 윤리적 고려 사항을 다르게 인식하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학의 발전과 기술 혁신으로 인한 생활의 향상과는 달리, 윤리와 도덕적 고민은 뒤처져 있는데, 이는 현대 사회의 기술 중심성,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 그리고 문화와 윤리의 다양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여기에 내가 생각하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당위성'이다. 당위성이라 함은 '마땅히 해야 할, 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성질'이다. 황우석 교수의 다큐에서 다음 말이 언급된다.
"과거에 당위성을 종교에서 찾고자 했다면
지금은 그 당위성을 과학에서 찾고자 한다."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부터 왔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모두 당위성을 찾길 원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아를 이해하고 주변 세계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을 가지며, 그들의 존재와 의미를 탐색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인간 본인의 존재에 대한 깊은 의미를 탐구하고, 자기 이해와 식별을 통해 자신의 위치와 목적을 찾으려는 욕구를 바탕으로 한다. 과거 종교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종교는 인간의 탐구와 궁금증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신화, 철학, 윤리, 영적 경험 등 모든 것이 총망라된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사람들에게는 탐구의 대상으로서 신을 제시하고, 존재의 기원과 의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여 인간의 고찰과 이해를 돕기도 했다.
과거 인간들은 큰일을 앞두고 있거나 불행이 닥쳤을 때, 종교에 의지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자신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인물을 신격화하고, 신을 만들고, 그들이 행하는 특별한 능력을 믿었다. 중세시대 때 온 유럽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흑사병이 예다. 당시 유럽인구의 30~50%를 죽인 이 거대 역병은 엄청난 공포를 가져다줬다. 의료과 과학기술이 제한적이었던 이때는 병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종교와 미신을 사용하고자 한 시도들이 있었다. 흑사병을 신의 벌로 간주하고, 신의 은총을 바라며 종교적인 회개와 신앙심을 표현하기 위해 교회에 몰려와서 예배와 기도를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종교가 갖고 있던 본연의 위치가 바뀌게 됐다. 물론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는 환자들은 때때로 종교의 힘을 믿기도 하지만 이때도 의료적 치료를 병행한다. 이처럼 종교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도덕적 의미와 삶의 지침의 방향을 제시해 주지만 과학의 발전과 함께 과거보다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고찰과 이해로서의 의미를 제공했던 종교와는 다르게 과학은 철저한 관측과 실험을 통해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법론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경험적 증거와 데이터에 기반하여 검증하는 과학적 방법론은 인간의 탐구와 궁금증 충족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또한 과학기술의 성과는 우리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며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발전을 이루어 왔기 때문에 점차 과학에 대한 신뢰가 높아져가고 사람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중요한 도구로서 과학을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종교를 맹신하듯 과학을 맹신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뭐든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질문에 대한 답을 종교 대신 과학에서 찾고자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부터 왔는가'라는 인간의 기원과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인간 본인의 자아의식과 존재 의미에 대한 탐구와 이해의 욕구에 기인한 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최후의 질문이며 인간의 당위성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이 최후의 질문에 다가서고 있다는 기대심이 과학에 인간의 당위성을 찾게 만들었다. 이 결과 윤리와 도덕적인 고민이 종종 과학의 발전을 따라오지 못하게 됐다.
설명이 길었지만 과거 줄기세포 사태가 터진 이유는 인간들이 과학으로부터 당위성을 찾기를 원하는 욕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의 당위성에 대한 답에 가장 가까운 '전능한 과학'이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를 통해 누운 자를 앉게 하고, 앉은 자를 일으키고, 선 자를 걷게 만들 것이라는 맹신을 작용시켰을 수도 있다. 이 허무맹랑한(물론 당시에는 가능할 것으로 봤던) 믿음이 작금의 사태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정리하자면 인간이 존재와 당위성에 대한 질문의 답을 과학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과학의 발전과 기술 혁신으로 인해 윤리와 도덕적인 고찰이 뒤처진 결과이며, 윤리와 도덕을 앞선 과학이 맹신을 만들고 이런 맹신이 줄기세포 사태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과학은 지금도 계속 발전해가고 있다. 만약 인간의 당위성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최후의 도구가 과학이라면, 우리는 조금 더 신중하게 이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도구도 완벽하게 독자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은 탐구할 수 있는 부분은 넓다 해도 유한하며, 인간의 삶에 대한 모든 측면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내놓진 않는다. 그렇기에 과학의 한계와 부족함은 다른 학문들과 상호 보완하여 윤리와 도덕적 측면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비로소 과학과 평행선을 걷는 완벽한 '신과학'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황우석 교수의 다큐에서 언급됐던 당위성에 대한 말은 한 부분만을 인용했던 것이다. 그 문장의 전체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부터왔는가는 하는 질문에 대해 인간은 모두 당위성을 찾길 원한다. 과거에 종교에서 찾고자했다면 19세기넘어 20세기를 거치며 인간은 그 당위성을 과학에서 찾고자한다.
이로인해 사람들은 신의 자리에 과학을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