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나는 인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선조들의 지혜에 존경을 감출 수 없었다

by 한월

트라우마코어(traumacore)라는 걸 아는가? 한국어로 굳이 번역을 하면 형용사를 나타내는 접미어 -core가 붙어서 '트라우마적인'이라는 뜻이다. 요컨대, 트라우마 요소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터넷에서 아기자기한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어두운 요소가 포함된, 어떠한 그런 상징적인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예를 들자면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분홍색 침대와 옆에는 귀여운 캐릭터 인형이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있는 배경은 다름아닌 바로 병원이다. 병원에 입원을 한다는 것은 어른인 지금으로 보면 무엇이 문제인가 싶겠지만, 이 트라우마코어라는 것은 우리의 어린 시절, 즉 한참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흔히 아이에게 있어서 병원은 결코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주사와 같이 나를 '아프게 했다'거나 '아팠다'라는 싫은 기억을 상기시키는 공간이다.

누구나 아픔, 고통, 괴로움은 싫어하지만, 어린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은 굉장한 충격이자 트리거(자극)였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그러한 기억은 점점 잊어간다. 잊고 싶지 않아도 잊어가게 되는 것이 잔인하지만 자연의 섭리이다. 괜히 망각이라는 것이 왜 있겠나. 머릿속으로만 기록한 일들은 쉽게 잊어진다. 만약 영원한 기억을 원한다면, 기록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만 있는 게 아니다. 기록뿐만인가, 무엇인가를 남겨야만 한다. 그것이 인간(후손)이든 물건이든...... 따라서 역사는 기억이 아니라 누군가가 남긴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기억은 왜곡되고 튀틀리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경험을 몇 번이고 반복해왔으니까. 불가언설성이라는 것도 존재하기에, 무엇을 남겨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내가 꿈에서 전 남자친구를 만나서 '사이좋게 나란히 걸으며, 벚꽃을 보았다'고 치자, 그런데 이건 정말 사실일까? 정말로 사이가 좋았던 건 맞았을까? 나란히 걸었던 것은 맞았을까? 꿈에서 봤던 그 꽃이 벚꽃이었을까? 어쩌면 매화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기억은 왜곡되고, 기록을 하면서도, 타인에게 말을 전하면서도 온전히 사실을 전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의혹이 드는 것이다.

이 의혹은 사람을 너무 괴롭게 만든다. 요즘 세상에서는 더욱 그게 잘 드러난다. 왜냐하면, 객관성과 철저함, 정확함을 지나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이 나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나친 것은 좋지 않은 게 확실하지만, 객관성과 정확함에 있어서는 의혹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한 개념이다. 그래서 편향은 좋지 않은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기 시작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지만, 사리분별을 못하고 무작정 그렇게 하는 건 명백히 철없는 짓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떼쓰는 것과 매한가지이다. 계몽주의니, 개인주의니, 이기주의니, ......그러한 것들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나조차도 바라건대, 단체의 흐름과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올바르고 선명한 신념을 꿋꿋이 지키는 게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답이 아닐까. 굳이 이 세상에서 정답이란 게 있다면 말이다.

뿐만 아니라, 특히 '착각'이라는 문제는 자각만이 해결책이며, 한번이 아닌, 몇 번의 고민으로 후회를 만들지 않고, 착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그럴 틈을 주지 않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고민해야만 한다. 여유가 없다는 건 핑계에 불과하다. 여유가 없더라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것은 도덕이나 법만이 아니다.

흔히 생각하라는 말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뻔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부실하고 어폐가 있게 느껴진다. 정확히 무슨 생각인지, 어떤 생각인지, 이러한 것 또한 고민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고민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자각은 없을 것이며, 자각하지 않는다면, 변화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각을 했다면, 망설일 것 없이 누구보다도 재빠르게 고치고 바꿔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리걸음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를 방치한 채 내버려 두고 지속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도태라는 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주변 환경과 분위기에 너무나도 쉽게 휩쓸리는 단점에도, 내 좌우명 하나는 절대로 바뀌거나 버리지 않는다. 인과응보, 자업자득. 뿌린 대로 거둔다는 건, 결코 단순히 선이나 악에 대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로서는 형용할 수 없는, 천문학적, 초자연적, 우주적,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돌연, 우연, 필연, 운명. 신의 존재 유무. 이러한 거창하고 그럴싸한 것들은 제쳐두고, '왜?'라는 질문에 우리는 초점을 두어야 한다.

'왜?'라는 질문에서부터 우리는 괴로워하며 성장할 것이다. 공감이 아닌, 이해. 누구랄 것 없이 경청에 집중하며, 기록하고, 고민하고, 되묻고,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게 바로 인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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