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초고에서도 주의 및 양해를 부탁드렸지만, 이 소설은 오로지 그 시대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이나 상황만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외의 세세한 부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생기는 역사적인 큰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때에 따라서는 의도치 않게 제국주의 전범국의 당시 문화를 찬양한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일본어와 상용한자가 다소 있습니다.
※이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목차
1.프롤로그
2.스즈에(鈴江)와 미치루(盈ちる)
3.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郞)와 수성(壽城)못
4.한여름 밤의 꿈
5.한여름 밤의 꿈: 강에서 흘러가는 방울
에필로그: with you.
프롤로그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은 아직 령이와 영이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즉, 우리가 스즈에와 미치루가 되기 전으로 시간은 거슬러 올라간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매미의 울음 소리가 귓가에서 시끄럽게 맴돌고 땡볕 아래서 그놈의 창씨개명인지 뭔지를 하기 위해서 줄을 서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를 반복해서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앞에는 험상 궂게도 생긴 헌병이 있었고, 그 옆에 한 명 더 헌병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대충 봐도 어려보이는 소년이 군복을 입고 서 있었다. 아마도 소년병으로 끌려간 남자애겠지. 그리고 서양복을 입은 여성이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라고 했다. 나는 “령강이예요.”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잘 못 들은 것인지 “네? 영강이요?” 하고 되물었다. 나는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 서 있던 험상 궂은 헌병이 나를 쏘아보았다. 내가 목소리가 작은 탓에 여자가 잘 알아 듣지 못한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크게 나온 것뿐인데 말이다.
“령(鈴)이요, 령.”
어쨌든 여자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다른 소년병은 나의 이런 태도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그저 더위를 먹어서 멍한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처음 내가 봤을 때 그 표정 그대로 있었다. 마치 햇볕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시멘트, 콘크리트와도 같았다. 왠지 모르게 그림자처럼 검은 조각상과 겹쳐보였다.
내가 령강이라고 대답하자 히라가나로 라고 적힌 종이를 들이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히라가나 한 자, 한 자를 읽어내어 나는 스즈에(すずえ)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제부터 스즈에로서의 삶을 살아가겠구나. 그래봤자 내 일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때 뒤에서 앳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기, 다 됐으면 비켜줄래?”
나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내 또래의 앳된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머리카락은 긴생머리에 긴 눈매에 삼백안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날카러워 보이는 눈과는 대비가 되는 둥근 얼굴을 가진 소녀였다. 그런 둥근 얼굴을 보아하니 조금은 살갑고 귀여운 아이일 줄 알았는데 원래부터 험한 말투인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 발걸음을 옮기려던 참에, 뒤에서 또 그 서양복을 입은 여자가 말귀를 못 알아 듣는 모양이었다.
“령이요?”
“아니요, 영이요.”
“네? 령이라고요?”
“영이요, 영.”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여자가 그제서야 령이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알아 듣고 마찬가지로 한자를 물으니 그 영이라는 소녀가 대답했다.
“아니요. 그러니까, 찰 영(盈)이라고요.”
아, 나와 같은 령이 아니라 영이라는 이름이었구나. 신기했다. 나는 저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아이라서 도무지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와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에 나는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이제 저 아이는 어떤 이름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될까. 종이에다가 글씨를 적고 있는 여자와 영을 번갈아 가며 멍하니 바라보았다. 몇 분도 되지 않아, 여자가 영에게 히라가나가 적힌 종이를 건네 받은 영은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읊었다.
“미치루.”
그녀도 이제 나와 비슷하게 미치루(みちる)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겠지. 나는 동질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약간 씁쓸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스즈에(鈴江)와 미치루(盈ちる)
미치루를 만난 건 아마 창씨개명을 하러 갔을 때였던 것 같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기억할 수 있지만 어쩌다가 이 인연이 칠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갔는지 모르겠다. 요컨대,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건 이미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 분명 나의 기억력이 안 좋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창씨개명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 나는 갑자기 울분과 서러움이 만감을 교차하는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 건지에 대한 막막함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더 이상 령강이라는 이름 대신, 스즈에라는 이름으로서의 인생이 보나 마나 어두운 미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스즈에든 령강이든 내 삶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정말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아니지만 인생에 별 지장은 없었다. 스즈에로서의 인생이든, 령강으로서의 인생이든 나는 나였다.
어릴 때 독립 운동을 하던 언니의 영향으로 잠시 그런 것일 뿐이다. 아무리 '스즈에'라는 이름으로 앞으로를 살아간다고 해서 이미 '스즈에로서의 삶'을 체념하고 받아들인 내가 언니와의 관계가 흐트러진 건 아니다. 여전히 언니와는 곧 잘 어울리곤 했고, 대화도 예전과 똑같이 평범하게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사실, 창씨개명은 우리 가족 중에서 나만 한 게 아니었다. 엄마도 요시코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한지 오래였고 아빠도 케이이치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우리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언니였다. 언니는 평강(平江)이라는 이름으로서의 인생을 아주 잘 살고 있다. 줏대 있는 언니의 성격으로는 당연한 거였다. 정말 끔찍한 일이지만 언니가 창씨개명을 했다면 히라에(ひらえ)였겠지.
언니는 어릴 때부터 책을 읽는 게 취미였고 글을 쓰는 데에도 재능을 보여서 최근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문학과로 수석 입학하여 잘 살고 있다. 그런 언니가 부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 그런 생각을 가끔 하곤 하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의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집안 형편 상 언니처럼 되지 못했고, 일찍이 돈을 벌기 위해 상업 고등학교로 입학했다. 거기서 나도 물론 언니 못지 않게 나름 성적도 우수하고 교내 대회에도 많이 참가해서 수상 경력도 어느 정도 쌓여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가고 지나갈 뿐이었다.
나는 심심하면 미치루를 불러 놀곤 했다.
미치루는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지만 그 때문인지 몰라도 미치루의 성격은 사납고 극도로 예민했다. 나도 어디 가서 예민한 성격에서 지지 않는데, 그녀는 나와 상황이 달랐다. 처음에는 그런 미치루 때문에 울기도 하고 화나기도 했었다. 지금은 미치루의 그런 성격도 많이 죽어든 것 같다. 사실, 나는 그런 기억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녀가 어느 날부터 어떤 이유에선지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지난 일을 회상하며 죄책감을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몇 번이고 괜찮다고 했다. 기억이 안 난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니' 하고 중얼거렸다.
미치루의 말에 따라선, 태어날 때부터 병원에서 말한 예정일보다 일찍 태어나 보통 아이들보다 무게가 덜 나갔다고 했다. 물론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고, 크면서도 잔병치레가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내가 훨씬 더 잔병치레가 많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미치루도 나의 의견에 동의하며 사실은 부모님이 자신이 외동이라서 너무 애지중지 키우느라 별일도 아닌데 호들갑을 떤 것뿐이라고 웃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미치루를 보며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미치루가 말하지 않은 이야기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는 아직도 만히 있겠지만 칠 년이라는 세월을 옆에서 지켜 봤을 때, 역시 미치루 쪽이 잔병치레가 더 많은 것 같다고 느꼈다. 잔병치레랄까 그녀는 불치병에 걸려 여름의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듯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방안 책상 위에 놓여진 약통을 애써 보지 않은 척했다.
어느 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장마라서 비가 오는 날이 잦아졌는데 유난히 습도가 높고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햇빛은 마치 천지창조라도 하듯이 탁한 구름 사이의 틈으로 한 줄기씩 내려왔다. 나는 그 광경이 최근에서야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딱히 이유는 없지만 굳이 이유를 만들자면 자연의 신비를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날 비가 오는 밤, 미치루가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다. 나는 비에 흠뻑 젖은 미치루의 모습에 놀라서 얼른 집안으로 들어 오라고 했다. 그녀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실례라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이미 밤 늦게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순을 보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러면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스즈에, 나 사실은 가출했어······.”
이유를 물어보니 미치루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게 실은 말하기 좀 그래.”
나는 미치루의 대답에 어쩔 수 없이 이유를 캐물을 수가 없었고 할 말을 잃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미치루를 집안으로 끌고 들어오게 만들어, 일단 수건이라도 줘서 말리라고 하는 게 최선이었다. 비가 그치면 돌아가라고 하려고 하니 미치루는 애써 거절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나는 미치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꼭 집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우연인지 뭔지 몰라도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는 바람에 정전이 일어나고 창밖이 번쩍하고 빛이 났는데 그 찰나의 순간에 이상한 쥐 가면을 쓴 어떤 사람이 내 방 창문 쪽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그나저나 밖에 있는 저 수상한 자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와중에 방금 전 홀로 미치루를 보냈던 게 생각이 나서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밖을 나가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나갈 용기가 없었다. 온갖 싫은 일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것만 같았다. 그때,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쥐 가면은 돌아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등줄기에 식은 땀이 줄줄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지 못해 용기를 내어 “누구야!”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 쥐 가면은 정체를 드러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더 유리창을 두들겼다. 공포심이 드는 와중에도 저 녀석이 대체 누구인지는 알아야겠다 싶어서 창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긴생머리에 날카로운 눈을 가진 익숙한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야!”
“헤헤, 놀랬어?”
“놀래고 말고 너 가출했다며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건 뻥이었어. 그걸 믿네, 스즈에는.”
불행 중 다행인지 그 이상한 가면을 쓴 수상한 사람의 정체는 미치루였다. 그날 미치루는 천벌을 받은 것일까. 나는 그날 권선징악의 사례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그런 장난을 치래? 벌 받은 거야.”
나는 비에 졸딱 맞아 결국에 몸져누워 버린 미치루는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약한 몸으로 잘도 이런 장난을 치는구나. 나는 그녀의 곁을 지키며 잔소리를 했다. 아무리 병자이지만 확실하게 짚어 가야할 건 있는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치루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듯 그저 실실거렸다.
“있잖아, 스즈에.”
“왜 그래, 미치루.”
“너 열 나 본 적 있어?”
“당연하지. 나도 은근 너만큼 잔병치레가 얼마나 심했다고.”
“그렇니? 아무튼 간에 열이 나면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 회전목마를 타면 이런 느낌일까.”
“글쎄. 타본 적이 없어서.”
“애초에 우리가 회전목마를 탈 일이 있을까?”
“그러게.”
“동경에는 놀이동산이라는 게 있대. 스즈에는 알고 있었어?”
“응. 당연하지.”
“그래, 그럼 나중에 내가 일본에 유학가게 되면 한 번 타보고 소감을 들려줄게.”
“그러든지.”
“너는 나보다 오래 살아야 해.”
“갑자기?”
“응, 너는 나보다 명줄이 길어. 나 같은 인간한테는 그런 게 보여. 그러니까 너는 나보다 뒤에 와야 돼. 그때도 내가 먼저였던 것처럼.”
“그때?”
“기억 안 나? 우리가 스즈에와 미치루가 되기 전에 말이야.”
“아아.”
“나는 지금이 훨씬 마음에 들어. 촌스럽게 영이가 뭐야. 영이가.”
“왜. 좋구먼.”
“그런가? 아무튼 너는 나보다 오래 살아야 돼.”
“무슨 소리야. 내가 훨씬 너보다 명줄이 짧거든.”
“흥, 글쎄다.”
“그러니까 너도 오래 살아, 미치루.”
그렇게 말하니 미치루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쿡쿡 대며 웃어 보였다. 솔직히 미치루가 이런 말을 하는게 처음이 아니었고 가출했다고 믿은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미치루는 감정 기복이 심했다. 중학교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좋은 성적을 받아서 나와는 다르게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심신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학교에 빠지는 일이 허다해졌고 그에 따라 성적도 형편없어졌다.
마치 나와 미치루는 거울과도 같았다. 거울에 비춰지는 글씨는 미치루지만 스즈에였고 반대로도 마찬가지로 거울에 비춰지는 글씨는 스즈에였지만 미치루였다. 지극히 당연한 논리였다. 미치루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자신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며 신나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이 그저 안타까웠달까. 아니, 이건 그녀에게 있어선 쓸데없는 동정과 연민일 뿐이라며 애써 이 씁쓸한 감정을 감췄다.
미치루에게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는 너무 회피형 인간이야.”
맞는 말이었다. 미치루는 사람을 잘 꿰뚫는다. 사람을 꿰뚫는다기 보다는 상상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은 것이지만 말이다. 나쁘게 말하면 망상이 너무 심하다. 그건 미치루 본인 스스로도 인정했다.
나답지 않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미치루도 잠에 들었으니 이제 그만 다시 집으로 가볼까. 미치루 어머니께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그렇게 잠든 미치루를 뒤로 하고 유유히 그녀의 집에서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郞)와 수성(壽城)못
나는 곧 잘 스즈에와 요 몇 년 전에 생긴 수성못에서 만나 놀곤 했다. 벌써 그게 칠 년이 다 되어 간다니 시간이란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성못은 미즈사키 린타로라는 한 일본인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수성못의 중앙에는 인공섬이 있었는데, 나는 그걸 보고 한 수 시를 지었다. 「수성못의 외딴섬」이라는 제목의 시였다.
아직 겨울이 되면 백골같이 드러나는
이름 모를 외딴섬이 하나,
여름이 되면 파릇파릇한 나뭇잎들과 덩쿨들로 덮혀지는
백로와 왜가리, 가마우지들의 마을
스즈에와 만나고 나서 시조를 배웠다. 스즈에의 언니도 마찬가지로 시조를 배웠다. 나도 스즈에의 언니, 평강 언니(그 언니는 예전의 독립 운동을 했던 영향 때문인지 창씨개명 하는 것을 거부했다. 평평할 평(平)자에 큰 내 강(江)자로 일본어로 읽게 되면 히라에(ひらえ)였을 터라 그리 불렀겠지만…)처럼 어릴 때 책을 좋아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자주 서점에 놀러 가고는 했는데 사실, 책만 읽으러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여름이 되면 서점에 가기 전에 있는 분수대에서 물놀이를 하러 가자며 엄마의 치맛자락을 질질 끌어 당기다가 혼이 났다. 최종적으로 그렇게 엄마와 실랑이를 하고 나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내가 이겼다. 그렇게 해질녘까지 분수대에서 물놀이를 하고 나면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물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목욕탕이 생겨 가끔 엄마를 따라가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탕에서 헤엄을 치곤 했다. 그러다가 목욕탕 주인에게 혼이 나면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몰래 물장구를 치곤 했다. 나중에는 그 주인도 포기를 했는지 탕에서 물놀이를 하는 나를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 보니 나는 정말로 철부지에 제멋대로인 악동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원래도 성질이 더럽다고 엄마나 이웃집 아주머니한테도 소리를 듣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장난스래 웃어 넘기곤 했다. 남들에게는 지옥이었겠지만 나는 나름 유쾌했다. 유쾌한 추억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물도 좋아하고 책도 좋아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 영향 때문인지 소학교 3학년생일 때의 장래희망을 '인어'라고 적어서 냈다. '인어는 직업이 아닌데…' 하고 한숨을 쉬며 한껏 수치스러웠다. 이 부끄러운 추억은 내가 5년 뒤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쓴 것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잊고 있었던 꿈을, 아니, 잃어버린 꿈을 되찾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날아갈 듯이 기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기억의 편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정확히는 내가 그런 생각을 수긍하고, 당연하다시피 현재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이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예전에 같은 반이었던 한 일본인 남자아이와 어쩌다가 싸우게 돼서 당연히 담임 선생님께 불려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 나름대로 억울함을 말하니 변명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님은 나에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과거는 과거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다. 그때의 나한테는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로 들렸다. 그렇게 따지면 역사는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몇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지금은 망국이 되어 버린 이 나라, 조선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가? 나는 절망감을 느꼈고 집에 돌아와서 통곡을 했다. 그저 선생님이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억울함에서 나오는 감정뿐만이 분명히 아니었다.
'미치루'
그 이름 하나에서 느껴지는 증오도 함께였다.
개천룡지개(芥川龍之介),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하목수석(夏目漱石), 나츠메 소세키
미기홍엽(尾崎紅葉), 오자키 코요
태재치(太宰治), 다자이 오사무
삼구외(森鴎外), 모리 오가이
최근에 나는 일본의 작가들의 이름을 한자 이름 그대로 부르는 버릇이 생겼다. 버릇이라고 하면 조금 어폐가 있으려나. 그러면 취미라고 해두자. 종이에 끄적인 다섯 명의 일본 작가들의 작품은 감상한지 오래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두자춘, 나츠메 소세키의 산시로, 오자키 코요의 장한몽, 다자이 오사무의 달려라 메로스, 모리 오가이의 무희 등등 전부 한글로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아 원서를 직접 손에 넣어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일본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일본어에 재능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큰 흥미를 느꼈다. 어려운 한자가 나올 때를 빼면 내용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에 있어서 크나 큰 어려움은 없었다. 평소 책을 읽으면서 문학 장르 중 일본 문학을 접하게 되면서 저절로 일본문학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렇다고 대일본제국이라는 그 나라를 찬양하고픈 마음은 요만큼도 없다. 그저 일본의 문학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일본의 문화에 대해 알고 싶어지게 된 것뿐이지 그 나라 자체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이게 대체 무슨 논리인가 싶을 테지만 말 그대로였다. 어느 누가 조국을 빼앗은 전범국을 좋아할 수 있겠는가.
나는 요즘 하목수석(나츠메 소세키를 일컫는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작품에 푹 빠져 있다. 하목수석의 속세를 비판하는 듯한 그의 해학적인 작품 속에서의 어조가 유쾌했기 때문이다. 일단 시점이 평범한 보통 소설과는 달리 어느 한 일본인 교사네 고양이로서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기에 신선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꽤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이건 보편적으로 모두가 그의 소설을 읽으면 그리 생각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소설 뿐만 아니라 외국 시에도 관심이 많다. 물론, 일본 문인의 시나 유명한 서양의 시인의 작품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한 시인이 있는데 바로 나카하라 츄야이다. 나카하라 츄야의 시 중 「서커스」라는 작품이 있다.
몇몇 시대인지가 있었더랬고
갈색을 띤 전쟁이 있었습니다.
(중략)
머리는 거꾸로 하고 손 늘어뜨려
지저분한 무명천 지붕 아래서
유아아앙 유요오옹 유야유요옹
나카하라 츄야의 특유의 오노마토페(의성어)가 독자로 하여금 흥겨움을 주는 게 참 마음에 들었는데 아마도 평소의 나카하라 츄야도 그런 유쾌한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나도 저절로 “유아아앙 유요오옹 유야유요옹”이라고 따라 부르게 되기 마련이다. 스즈에와 함께 수성못을 거닐 때 멍하니 유난히 여름의 푸른 하늘을 응시하며 나도 모르게 “유아아앙 유요오옹 유야유요옹”라고 하니 스즈에는 “풋” 하고 웃어댔다.
“그게 뭐야, 미치루.”
“최근에 빠진 한 시인의 소리야.”
“마치 동물의 울음 소리 같이 말하네.”
“그럴지도.”
나도 스즈에의 말에 동의하며 웃어 보였다.
우리는 미즈사키 린타로(모리 오가이의 본명도 린타로였던 것을 나는 무심코 떠올렸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수성못을 거닐었다. 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郞)의 미즈시마(水島)를 바라보며 억지로 말장난을 만드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 이름 값이라도 하는 듯 물 수(水)자가 들어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수성못의 수는 물 수가 아니라, 목숨 수(壽)다. 그나저나 어쩌다 보니 나는 미즈사키라고 해야할 것을 미즈시마라고 말해버렸다. 스즈에는 무엇인가의 이상함을 느끼고 미즈사키라고 고쳐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수성(壽城)못 입구에 있는 바위에 새겨진 그의 이름을 보며 잠시 걷는 것을 멈췄다. 바위를 응시하고 있던 나는 묘한 시선이 느껴져 스즈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나니 스즈에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실망했어.”
“왜?”
“미치루가 한자를 착각하다니...”
“죽을 때가 다 됐나 보지.”
“···그렇게 말하지 마.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버리는 거야. 그저 장난일 뿐이었다고.”
나는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어 스즈에에게 나답지 않게 목소리를 내리 깔고 사과를 했다. 스즈에도 사과했다. 나는 스즈에의 사과에 더 미안함을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웃어 넘기거나 그냥 넘어갔을 일이지만 정말로 죽을 때가 다 된 것일까. 아니, 분명 더위를 먹은 게 분명하다. 더위를 먹어서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나는 스즈에를 재촉하여 아이스를 사러 가자며 이 묘한 상항을 무마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스즈에는 “네가 사주는 거지?”라며 농담을 했다. 나는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한여름 밤의 꿈
어느덧 우리는 열여덟 살이 되었다. 나는 당연히 이 형편없는 성적과 집안으로는 그토록 바랐던 국문학과에 가지 못할 것을 알고 아예 자포자기를 한 채 집안에만 틀어 박혀 지냈다. 상업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스즈에는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공장으로의 취업이 거의 보장되어 있었다. 오히려 나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아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이었다. 스즈에는 학교에서 전교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는 모범생이자 우등생이었고 그에 비해 나는 학교에서 사소하지만 늘 문제를 일으키고 형편없는 성적을 받아오고 또한 병약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요컨대, 학교에 가봤자 남들에게 피해만 줄 뿐인 문제아이자 귀찮은 존재였다. 분명 담임도 골머리를 앓고 있으리라고 제멋대로 해석(망상)했다.
내 이야기는 무기력하고 생명력이 없을 뿐더러 희망이란 보이지 않아 재미없으니 스즈에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스즈에는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공장으로 실습을 하러 갔다. 항상 밤 늦게까지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허다해서 예전처럼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나 또한 최근에 부쩍 심신이 쇠약해져 열에 시달려 몸져 눕는 일이 허다했고, 각자의 사정으로 만날 수 있어도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내가 건강했어도 상황은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었겠지. 나도 정상적으로 열여덟이 되었다면…….
스즈에와의 마지막 만남은 다가오는 신년을 위해 동네 신사에서 같이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나서 헤어진 이후로 가진 적은 없다.
바깥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스즈에와 달리 나는 늘 집에만 틀어 박혀 있으니 할 거라곤 독서나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글을 쓰는 일은 한번 쓰면 시간이 훌쩍 가서 뭐라도 했다는 성취감이 들지만, 금방 지쳐버리기에 거의 독서만 했다. 읽던 책을 또 읽기도 하고, 아버지가 어쩌다가 동경에 볼 일이 있을 때 일본 내에서 유명한 문인의 책뿐이었다. 운이 좋으면 서양 작품도 감상할 수 있었는데,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이었다. 그의 시집 중 「이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시가 있었다. 나는 그 시를 읊었다.
예를 들면, “밤은 별이 많다. 별들은 파랗게 떨고 있다, 멀리서, 파랗게.”라고 쓸까?
밤하늘은 하늘에서 돌며 노래하는데,
나는 이 밤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
(중략)
그녀의 그 커다랗게 응시하는 눈망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
이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
문득 그녀가 없다는 생각. 문득 그녀를 잃었다는 느낌.
황량한 밤을 들으며, 그녀 없이 더욱 황량한 밤.
나는 이 시를 감상하면서 벗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슬픔은 만국의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도 지금 스즈에와 함께 할 수 없는 슬픔이, 그리움이 내 가슴 속에서 사무치고 있다. '이 황량한 밤에 말이다!'
한여름 밤의 꿈: 강에서 흘러가는 방울
미치루와 만나지 못한지 참 오래된 것 같다. 그도 그럴게 나는 3학년이 되고 나서 공장 실습을 나가느라 좀처럼 미치루와의 만남을 가지지 못했다. 매일 늦은 밤까지 일을 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엄청난 피로감에 뻗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어느샌가 유월달이 되었다. 봄을 고하고 여름의 녹엽이 무르 익을 무렵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공장 실습을 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적절하게 하고 학교 교복을 수선해서 만든 작업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공장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온 것 같았다. 나는 일찍 온 만큼 어젯밤 잔업을 정리했고 기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 시간이 되었다. 나는 밤에 조금이라도 일을 덜하기 위해서 점심을 거르고 계속해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해는 지고 있었고 다들 정신 없이 기계를 돌리고 부품들을 조립하고 있었다. 동료가 잠시 볼 일이 있다고 해서 일을 대신 도맡았다.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이 밤이 찾아왔다. 시계를 보니 벌써 9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했을 때 하필이면 공장장이 들어서 큰 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다급해진 나는 속도를 높여 부품을 조립하고 또 조립했다. 마지막으로 기계를 조작하기만 하면 끝인데 그 기계로 다가갈 때 다른 직원들이 소리 질렀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뒤를 돌아 보았지만 시야는 땅바닥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시야가 흐려졌다. 속으로 “얼른 괜찮다며 일어나야 될 텐데.”, “안 그러면 공장장한테 혼날 텐데.” 그런 걱정을 하며 갑자기 눈이 감겼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이었다. 오른쪽 팔에 통증을 느낀 채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오른쪽 팔에는 붕대로 감겨져 깁스를 하고 있었다. 두통도 살짝 느껴져 머리를 매만지니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옆에는 언니가 눈물을 흘린 채 침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언니의 모습을 보고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 폐를 끼쳐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언니를 불렀다.
“언니······.”
언니는 풀린 눈으로 나를 몇 초 응시하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나를 안았다. 나는 갑작스런 언니의 행동에 부담감을 느꼈지만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언니는 나의 원래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령이야...!”
“응, 언니. 나 괜찮아.”
“그래, 괜찮아? 어디 더 불편한 곳은 없지? 언니가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
“응.”
그렇게 혼자 병실에 남겨진 나는 처음 고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미치루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치루를 생각하니 미치루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괜히 걱정이 되었다. 물론 자신이 그럴 처지는 못 된다지만 미치루는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고, 무엇보다도 미치루가 그리웠다. 그동안 미치루는 이런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루에게도 미안함을 느꼈다. 아프지만 아플 자격이 있는지 생각했다. 나는 깁스를 한 오른쪽 팔을 보며 이 답답한 마음을 어디에 풀어야할지 고민했다.
“다행히 아예 못 쓰게 된 것은 아니지만 뼈가 산산조각이 나서 최소 반 년은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각별한 주의를······.”
의사의 말이 마치 외계어 같았다. 웅웅 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일어난 사실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석 달의 입원 끝에 드디어 집에 갈 때가 되었을 때까지 깁스는 풀지 못했고 당연히 실습은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 오니 우편함에는 내게로 온 편지가 쌓여 있었다. 언제 보낸 것인지 모를 엽서까지 합치면 언니의 전공책 두께 쯤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보니 편지와 엽서는 미치루에게서 온 편지였다. 답장을 기다렸을 미치루를 생각하니 조금 무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미치루가 먼저 편지를 보내오다니 생일 때 빼고는 없을 터였기에 기쁜 마음이 앞섰다. 나는 방에 그것들을 한 가득 가지고 와서 하나씩 하나씩 편지 봉투를 뜯어 보았다.
안녕, 스즈에.
잘 지내지? 요즘 바빠서 잘 못 만나서 아쉬워.
답장 꼭 부탁해.
1941년 6월 29일
안녕, 스즈에.
장마(梅雨)라서 그런지 비가 많이 오네.
최근에 아버지가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을 갖다 줘서 읽었는데 네가 생각났어.
너와 놀고 싶어.
1941년 7월 14일
스즈에, 답장을 못할 정도로 바쁜 거야?
굳이 답장해줄 필요는 없으니 안심해.
1941년 7월 16일
혹시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니지?
사실 짐작 가는 건 없지만
일단 미안해...
1941년 7월 17일
아, 그렇지.
나 학교 그만 두었어.
최근에 열이 심하게 올라가서 많이 쓰러졌거든.
사실 올해 봄부터 그랬는데 말하지 못해서 뭔가 미안해.
1941년 7월 24일
죽을 때가 다 된 것 같아.
내년 봄에 너를 만날 수 있을까?
스즈에,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1941년 8월 15일
오늘은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어.
늘 그렇지만 오늘 처음 일어나서 너에게 편지를 써.
스즈에, 너는 잘 지내지?
1941년 9월 14일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어.
병문안 올 수 있으면 와.
주소는 추신으로 남겨둘게.
1941년 9월 30일
나 주치의한테 들었는데 나 이제 곧 얼마 안 남았대!
...는 장난이고 오늘은 멀쩡해.
내년 봄에 같이 수성못에 하나미(꽃구경) 하러 가자.
1941년 10월 2일
정말 하나같이 미치루다운 편지들이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니 미치루의 끈기와 근면함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잘도 이렇게 잔뜩 보냈구나. 아, 물론 몸 상태가 최악일 때는 보내지 않은 것 같았다. 나도 미치루에게 답장을 하려고 책상의 서랍장을 뒤져 편지지와 연필을 찾았지만 오른손 잡이였던 나는 이래서야 글씨를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왼손으로도 아예 못 쓰는 건 아니었다. 병원에 있을 때 왼손을 사용하는 것을 습관으로 들여놔서 조금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삐뚤빼뚤하지만 나름 알아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동안 답장 못해서 미안, 미치루.
사정이 좀 있어서 네가 편지를 보낸지도 몰랐어.
오른팔을 다쳐서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데 양해 부탁할게.
1941년 10월 19일
결국 반 년이 지나도 깁스는 풀 수 없었다. 어느덧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치루를 볼 수 없었다. 내년 봄에 수성못에 같이 하나미를 하러 가자고 한 건 미치루 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만날 수 없었다. 또한, 편지의 답장도 끊긴지 오래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믿자.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매일 미치루에게 편지를 보내는 게 일상이 되어버릴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된 건 다 미치루의 탓으로 돌려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미치루를 미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가 미치루를 사랑하고 있고 이 세상도, 신도 미치루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기도했다.
여느 때와 같이 나는 편지를 쓴 봉투를 들고 오랜만에 수성못을 찾았다. 혹시나 미치루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수성못은 누군가에게는 사소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장소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미치루와 함꼐 했던 아주 특별한 장소였다.
'수성못의 외딴섬'은 녹엽들로 덮여 새들의 밀림이 된지 오래였고 호수의 물은 햇볕에 반짝거렸다. 매미의 울음 소리가 시끄럽게 내 귓가를 적셨다. 불쾌할 정도의 더위였지만 상쾌한 바람이 물가를 타고 살며시 불어왔다. 나는 나답지 않게 자연을 느껴보기 위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자 매미 소리는 그저 배경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고 바람에 살랑이는 버드나무의 가지들이 미치루의 긴 머리카락을 떠올리게 했다. 눈을 감았지만 보였다. 미치루가 말이다. 미치루가 나의 이름을 부르며 해맑게 웃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그때, 한 백로가 배롱나무(목백일홍) 위에 살포시 앉았다. 그러고 나서 그 백로는 홀연히 떠나가려는 듯했다. 나는 황급하게 그 백로를 뒤쫓았다. 마치 저 백로를 따라가야 될 것만 같았다.
そこは行けへん!とっとと東京の向こへ飛んでいけ!
"거긴 안 돼! 얼른 동경 쪽으로 날아가!"
나도 모르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필사적으로 달렸다. 푸르고 맑은 하늘 아래 나는 수성못의 산책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그 백로는 이상하게 물가로 가지 않았다. 마음 한 켠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로는 자유롭게 두 흰 날개를 뻗어서 공중을 날았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살짝 오르락내리락 하는 듯했다. 그런 와중에 풀잎의 내음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희망에 가득 찬 냄새였다. 빛의 냄새가 있다면 이러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로를 따라간 끝에 도착한 곳은 한 정자 앞이었다. 숨이 하도 차서 땅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어 고개를 드니 내 또래쯤 돼 보이는 한 앳된 여인이 있었다. 까만 생머리에 길다란 원피스 자락으로 가련히 앉은 두 발을 가린 채 배롱나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자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여인은 자신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낌새였다. 하지만 하나도 서럽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기대를 할 수 있도록 하게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빛을 보게 한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여인은 듣지 못한 건지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나는 결심한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미치루?”
그제서야 여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의 얼굴은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눈을 바라보니 긴 눈매와 삼백안,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미치루라는 것을 말이다.
'다행이다. 미치루다. 미치루야!'
에필로그: with you.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난지 어느덧 1년이 지나가고 봄이 찾아왔다. 삼월 말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벚꽃은 사월인 지금 만개해서 온 동네에 꽃잎이 내려앉고 있다. 미치루와 재회한지 4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생각해 보니 이제 미치루라는 이름은 필요 없어졌다. 하지만, 미치루는 이게 편하다며 계속해서 '그'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다. 나도 미치루의 말에 따라서 그냥 스즈에라고 불러도 좋다고 하니 만족한 표정으로 헤헤 하고 웃어 보였다. 미치루는 처음에 만났던 모습 그대로였다. 흑발에 긴 머리카락과 긴 눈매, 삼백안, 장난스럽지만 그렇다고 철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고 적당히 그 나이에 맞는, 젊음 그 자체였다. 미치루의 건강은 다행히 예전과 같지는 않았고 많이 호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벚나무 아래를 지나가는 미치루에게 말했다.
“그것 봐. 내가 뭐랬어. 너보다 내가 명줄이 짧다니까.”
미치루가 저기 멀리서 빙그르르 무희처럼 돌았다. 그러자 미치루가 입고 있던 흰색 원피스 치맛자락이 하늘하늘 휘날렸다. 그 순간, 봄바람이 불어와 벚나무에 있던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치루와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동시에 “예쁘다.”라는 말을 했다. 우리는 그게 우스워서 마치 옛날로 돌아간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서로의 눈에는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아마도 앳된 소녀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으리라.
나는 그리 생각하고 “역시 친구를 잘 사귀었어야 했어.” 하고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니 미치루가 되물었지만 아무것도 아니야 라며 넘어갔다.
나는 앞서 가는 미치루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영이야!”
미치루는 앞서 가다가 나의 외침에 흠칫해서는 뒤를 돌아본 채 소리 질렀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그럼 너도 내 진짜 이름 불러줘!”
“하, 진짜 귀찮게.”
···…령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