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2022)
엄정한 글에 숨은 햇빛
읽은 날 : 2022.9.1(목)~9.10(토)
쓴 날 : 2022.9.10(토)
면수 : 901쪽
표지만으로도 엄숙해지는 책이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면 더더욱 무겁고, 그럼에도 끝까지 읽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는 지금까지 읽은 정민 선생님 책 중 문체가 가장 엄정(嚴正)합니다. 어떤 부분은 명료하고, 12부 '묻힌 기억과 오염된 자료'(711~778쪽)처럼 특정 자료가 위작임을 논증하는 과정은 서릿발 같습니다. 그만큼 오래 읽었고 보는 내내 아슬아슬했습니다.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는 초창기 천주교의 역사를 다룬 책입니다.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이 『교우론』과 『칠극』 읽기로 이어지면서 '봄비에 속옷 젖듯'(34쪽) 서학에 빠져든 선비, '천주의 계명을 지키고 성호를 긋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누구나 차별 없이 천국에 갈 수가 있다'(638쪽)고 믿었던 민초와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평등하고, 평화롭고, 공평한 세상'(638쪽)을 꿈꾸던 그들에게 조선 사회는 너무나 가혹했고, 종교적인 열망과 신세계에 대한 동경은 지배층에게 '체제전복의 위험하고 불온한 시도'(638쪽)일 뿐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성교요지』와 『만천유고』 위작 논란도 그렇습니다. "나는 어느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금한 진실을 밝힌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10쪽) 위험부담이 큰 글을 신문에 연재하고 책으로 맺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 글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학자의 양심과 종교인으로서의 도리. 그 둘을 아우르고 붙들기 위해 연구하고 논증하는 과정을 깊이 새겼습니다.
불편한 진실이 있고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읽은 건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학자로서 모든 것을 걸고 달려가는 용기, 흐릿한 기록 속에서 그때 그 사람들을 불러오는 생생함이 행간에 진하게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역사의 격랑을 넘어 밝게 빛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엄정한 글에 숨은 햇빛입니다.
<마음에 남은 글>
각각의 글은 기존에 알려진 내용은 되풀이하지 않고, 새 자료의 제시로 다른 관점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같은 자료라도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10쪽
정보는 해석을 통해서만 생기를 얻는다. 해설을 해석으로 착각하면 학문은 없다. 자료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것은 질문과 해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13쪽
글이 길을 잃고 생각이 막막하거나 기억에만 남은 자료를 못 찾아 애가 탈 때, 내 어깨 위에 얹히던 손길을 생각한다. 14쪽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손길과 많은 인연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15쪽
이렇게 해서 신분의 벽을 허물고, 말씀으로 하나가 되는 교회공동체의 꿈이 위태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전에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평등한 세상을 복음을 통해 열고자 했다. 191쪽
이희영에게 '추찬'이라는 호를 지어준 사람은 이덕무였다. 그의 이름 희영(喜英)이 꽃잎[英]을 기뻐한다[喜]는 뜻이어서, 《이소경(離騷經)》에 나오는 "아침엔 목란에 지는 이슬 마시고, 저녁엔 가을 국화의 진 꽃잎을 먹누나"에서, 가을[秋] 꽃잎을 먹는다[餐]는 뒷구절을 따서 지은 것이다. 537쪽
스쳐가는 기록 속에 보석이 박혀 있는 수가 있다. 한쪽에서 지워져 말소된 정보가 다른 기록을 통해 보정되기도 한다. 기록의 교차 검토가 반드시 필요한 까닭이다. 6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