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밀의 『청춘보다 푸르게, 삶보다 짙게』(2022)
할 수 있을 때, 함께 있을 때
읽은 날 : 2022.2.17(목)~2.19(토)
쓴 날 : 2022.2.22(화)
면수 : 239쪽
"백발의 기세는 초저녁 별이 생기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별 하나만 보이더니, 금세 두세 개의 별이 나오고, 별 셋이 나온 뒤엔 뭇별이 다투어 나오듯 하네."(187쪽) '누가 이렇게 멋있는 말을?' 마지막 줄 보니 정약용! 마흔 넘어 하나둘 찾아온 흰머리와 이마 주름이 버거웠는데, 옛사람도 같은 고민 했다 생각하니 읽던 글을 다시 보게 됩니다.
『청춘보다 푸르게, 삶보다 짙게』는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옛사람의 글을 모으고 풀어낸 책입니다. 부제목만 보면 마냥 어두울 것 같지만, 읽어보니 노을 앞에 차 한 잔 곁들인 그윽함이 밀려옵니다. 박지원의 <맏누이 박씨 묘지명>은 언제 봐도 슬프고, 삶의 유한함과 소중한 이에 대한 그리움을 읽으면 하루하루가 더 귀하게 다가옵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늙음과 죽음. 무거운 명제이지만 그만큼 '할 수 있을 때'와 '함께 있을 때'의 가치를 일깨우는 자산이기도 합니다. 할 수 있을 때 더 가열차게 살고 함께 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하는 삶. 여기에 아름답게 나이드는 과정이 있다면 "늙음이 가져다주는 지혜"(162쪽)가 "오래 묵힌 포도주처럼 깊고 그윽"(162쪽)할 수 있을까요.
아껴 읽고 독후감 쓰려는데 뜻밖의 감기몸살이 찾아왔습니다. 나흘 꼬박 앓으면서 조귀명의 글과 삶을 다시 읽었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저녁이나 맑은 아침에 지인과 천천히 산책하는 일, 꽃을 감상하고 달을 구경하는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234~235쪽) 이 글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따뜻한 시선, 맑은 언어, 옛글을 오늘 한순간으로 불러오는 깊이를 배웁니다.
<마음에 남은 글>
멋지고 좋은 일만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좀 미안하고 아쉬운 경험이, 지나고 나면 진한 그리움이 된다. 81쪽
그(한충)가 한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바란 것은 마음을 잘 붙들어 나가고, 부귀영화에 마음 쓰지 말며, 저절로 오는 행운일지라도 옳은 것만 취하고, 오지도 않는 것에 아등바등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100쪽
가까운 이에게 좀 더 따뜻하고, 한 번이라도 더 안부를 물을 일이다. 107쪽
진실로 삶은 나의 소유가 아니며 하늘과 땅이 잠시 맡겨둔 것이다. 111쪽, 신흠, <부쳐 사는 집>
우리가 지금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나라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은 이름 없는 순국선열들 덕분이다. 132쪽
저물녘의 노을은 한낮의 하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비하고 아름답게 하늘을 물들인다. 오렌지와 귤은 한 해가 저물어갈 때 더욱 짙은 향기를 자아낸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늙어갈수록 젊은 시절엔 지닐 수 없었던 지혜가 풍성해진다. 젊음이 패기와 용기를 준다면 늙음은 지혜와 성숙을 가져다준다. 151쪽
늙음은 육체의 힘을 약하게 하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삶에 여유를 가져다준다. 늙어서야 인간은 비로소 관대함과 인자함의 덕목을 갖게 된다. 늙음은 낡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177쪽
고잉 그레이(Going Grey), 염색하지 않고 흰 머리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의미이다. 흰머리는 부끄러운 색이 아니다. 오히려 흰머리는 늙음과 지혜를 상징한다. 흰머리는 원숙미와 중후한 품격을 느끼게 한다. 2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