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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한문샘 Oct 05. 2022

정민의 『파란 1』(2019)

낯설고 푸르른 다산을 만나다

읽은 날 : 2019.9.2(월)~9.6(금)

쓴 날 : 2019.9.8(주)

면수 : 363쪽

* 3년 전 글을 다듬었습니다.


파란(波瀾)! 제목 참 잘 지었다 싶었습니다. 한자로 보면 파란만장한 다산의 삶, 한글만으로 읽으면 유배 전 푸르른 젊음. 두 글자에 기막히게 다산의 일생을 담아냈단 감탄에 책장 넘기기 전부터 두근거렸습니다. 한국일보 <정민의 다산독본> 연재물을 꼬박꼬박 읽어 글은 낯설지 않습니다. 신문 원고보다 책 글이 조금 더 깔끔해 보입니다. 그만큼 가열차게 다듬었단 뜻이겠니다.


파란 1은 다산의 마지막과 당대 학자들의 평가, 어린 날부터 서른 살 진산사건까지를 담은 책입니다. 젊은 다산은 까칠하고 자기 주장 강한 천재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반드시 자기 색깔을 입혔고(31쪽) 한번 논쟁을 시작하면 상대가 승복할 때까지 끝내지 않았다(32쪽)고 합니다. 직선적이고 저돌적인 성품은 놀라운 업무추진력으로 정조에게 사랑받은 비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곳곳에 적을 만드는 지름길이기도 했습니다.


1장이 다산의 소년 시절과 가족사, 2장이 정조와의 인연이라면 3~6장은 천주교 관련 글입니다. "다산은 신부였다"(4장)는 주장이 다소 급진적으로 읽히지만, 치밀한 고증과 간결하면서도 역사소설 같은 흐름 따라 읽다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사실 다산과 천주교의 관계는 학계와 천주교 둘 다 뜨거운 감자입니다. 파란 1에서는 다산이 정조와 가정을 위해 표면적으로 배교했지만 마음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서른 살까지 성취지향적이고 치열한 전략가였던 다산은 파란 2에서 금정찰방과 곡산부사라는 뜻밖의 지방 벼슬을 통해 백성을 아끼는 목민관으로 거듭납니다. 가족과 정조에게 아낌없이 받은 사랑, 천주교라는 은하수 안에서 쌓아온 가치관이 있었기에 훗날 큰 역경에 꺾이지 않고 자기를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다산이 정조가 선물한 병학통을 읽고 쓰다듬으며 고마운 기억을 불러내는 장면은 언제 읽어도 짠합니다.


<마음에 남 글>


인간에게 고통과 시련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역경 속에서 어떤 자세를 지닐까?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다산을 통해 얻고 싶은 대답이 아직도 참 많다. 34쪽

-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삶을 바꾼 만남, 그밖의 다산 관련 저작을 가로지르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산의 모든 저작의 바탕에는 수학적 질서와 과학적 사유가 깔려 있었다. 36쪽


질문의 포인트를 명확하게 갈라 논거를 들어 핵심을 찌른다. 선입견 없이 문제에 집중한다. 이것이 평생을 일관한 다산의 공부 방식이었다. 61쪽


형제는 첫눈이 싸라기처럼 내리고 냇물에 살얼음이 얼 무렵 들어와서 겨울을 났다. 새벽에 일어나 시내로 달려가 양치하고 세수를 했다. 식사 종이 울리면 승려들과 열 지어 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저녁 별이 뜰 때는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며 시도 읊었다. 한밤중에는 승려들의 독경 소리를 들으며 다시 마음을 다잡아 방바닥에 무릎을 딱 붙이고 독서에 몰두했다.

다산은 이때의 밀도 있는 공부를 오래 잊지 못했다. 73쪽


다산 생애에서 정조는 천주교만큼이나 크고 깊은 그늘이다. 90쪽


다산은 심경밀험(心經密驗)에서 이렇게 썼다.

"옛사람의 편지글을 보면 이름과 덕망으로 다른 사람의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은 글자의 획이 반드시 모두 장중해서 거칠거나 들뜬 기운이 없었다. 내가 평생 배우고 싶었지만 매번 글씨를 쓸 때마다 겨를이 없어 또 능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무릇 글씨란 마음의 깃발이다. 정성스러운 마음이 밖으로 드러남이 이처럼 분명한 것이 없다. 하물며 한번 종이에 쓰고 나면 100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17~118쪽


다산은 속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손이 빠른데다 총기가 뛰어나 대화를 그저 옮겨도 거의 녹취록 수준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129쪽


메모는 다산 학술의 출발점이자, 거의 모든 것이었다. 다산과 그의 제자들은 메모하는 것으로 그들의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엔 임금이 묻고 다산이 대답했다. 임금이 세상을 뜬 뒤에는, 다산이 묻고 제자들이 대답했다. 공부는 이렇게 문답과 메모를 통해 대물림되었다. 133~134쪽


젊은 날의 다산은 혈기가 넘쳤고, 단도직입적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고 구차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또래 그룹의 리더였고, 행동 대장이었다. 직선적이고 떳떳한 다산의 성격과 행동은 훗날 다산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하고, 위기에서 건져내기도 했다. 242~243쪽

다산의 『병학통』에 오랜 기억이 밀려와 23년 된 자전을 같이 놓았습니다. 둘 다 평생 스승님께서 믿음을 실어 주셨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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