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다독이는 '잠깐'

by 스마일한문샘

슬픔이 밀려와 사방을 둘러봐도 막막하면

그저 땅을 뚫고 들어가고 싶을 뿐, 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하지만 다행히 나에게는 두 눈이 있어 글자를 알기에

책 한 권 들고 마음 다독이면

잠시 후에는 가슴 속의 꺾이고 무너진 마음이 약간 진정된다.


-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哀之來也, 四顧漠漠, 只欲鑽地入, 無一寸可活之念.

애지래야, 사고막막, 지욕찬지입, 무일촌가활지념.

幸余有雙眼孔頗識字. 手一編慰心看, 少焉, 胸中之摧陷者乍底定.

행여유쌍안공파식자. 수일편위심간, 소언, 흉중지최함자사저정.


* 『청장관전서』(한국고전번역원)를 참고하여 다시 번역했습니다.


'히유!' 막내가 잠들었습니다. 우유 한 잔 데워 오늘 처음으로 책상에 앉았습니다. 평일보다 바쁜 주말, 잠깐의 여유는 다음 날의 힘입니다. 특히 몸과 마음이 바글바글 끓을 때 '잠깐'은 축복입니다. 아이들 보는 틈틈이 숨 고르고 커피 마시고, 조금 길게 쉬면 책 읽고 글 쓰고. 그 '잠깐' 덕분에 더 따듯하고 차분해집니다.


첫 담임 때 어려운 반을 받았습니다. 1년 내내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옆 반 선생님도 비슷한 상황이라 가끔 교무실에서 초콜릿 까먹으며 아이들 이야기로 마음을 달랬습니다. 첫 복직하고 여러 일로 마음이 내려앉으면 퇴근하다 카페에 들렀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카페모카 한 잔 놓고 책 읽다 어린이집 하원버스 시간 맞춰 부랴부랴 나왔습니다. 짧게는 10분, 길면 30~40분. 그 힘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임용고사 재수, 삼수할 때 이덕무 글을 많이 읽었습니다.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사서 읽고 또 읽고 밑줄 긋고 메모했습니다. 찬찬히 보면 흐린 하늘 같던 마음에 햇살이 살풋 찾아왔습니다. 서얼이라 서러운 일 자주 겪고 가난해서 『한서』 이불, 『논어』 병풍으로 겨울을 보낸 사람. 그러나 글에 담긴 깊고 맑은 정신과 성실한 삶은 슬프도록 아름다웠습니다. 20대 초반에 만난 이덕무를 지금까지 아끼는 까닭입니다.

그때 읽던 글을 다시 봅니다. 전에는 책 읽으며 마음 추스르는 걸 먼저 생각했는데, 오늘은 '少焉(소언)' 두 글자가 정겹습니다. 잠시, 잠깐, 조금 지나서. 그 시간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이덕무도 없었겠지요. 자주 아픈 몸과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을 잠깐, 또 잠깐 책으로 달래던 그가 눈에 선합니다. 2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다독이는 '잠깐'은 고귀한 선물입니다.

사진은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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