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생각지 못한 곳에서 큰 울림을 만납니다. 『고집쟁이 초정의 작은 책』도 그랬습니다. 믿고 보는 김주현 작가님 책이라 더 반가웠습니다. 작가님 책에는 삶의 그늘을 다양한 방법으로 넘어선 사람들의 따스함이 있습니다. 『까막눈이 산석의 글공부』, 『간서치 형제의 책 읽는 집』 읽다 뭉클하고 울컥했던 기억에 이번 책도 설레는 마음으로 열었습니다.
"햇볕에 책을 말리던 날 / 저녁에 다섯 살부터 열 살까지 내가 가지고 놀던 / 장난감 상자를 발견했다. (중략) 그리고 손바닥만한 책도 열 권 남짓 있었는데 (후략)"(2~3쪽) 누구나 한 번쯤 겪을 만한 이야기. 집안 정리하다 오랜 물건 찾으면 잠시나마 아련한 옛일에 빠져듭니다. 박제가에게는 그 물건이 책입니다.
"부지런히 글을 익혀라. 네가 읽은 문장들이 힘들 때 너를 지켜 줄 테니."(19쪽) 어릴 때 만든 책이 열한 살 박제가를 일으켜 세웁니다. 마음 맞는 글은 한 자 한 자 옮겨 쓰고 느낌과 생각은 다부지게 정리한 책. 어쩌면 평생 그러지 않았을까요. 막막한 현실에 좌절하다 읽고 쓰며 마음 털고 일어서는.
처음엔 책과 붓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다시 읽으니 부모님이 보입니다. 책 만드는 막내가 기특해 종이가 모자라면 아낌 없이 갖다 준 아버지, 남편 없이 삯바느질로 하루하루 견디면서 방황하는 아들을 기다려 준 어머니. 그 사랑 넉넉히 받았기에 더 깊고 당당하게 자랐겠습니다.
* 박제가는 자신의 시집에서 호를 초정(楚亭)으로 삼은 까닭을 밝힙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초사(楚辭)』 읽기를 좋아해 초정으로 호를 삼는다." 그는 『초사] 중에서도 <이소(離騷)>를 가장 아꼈다고 합니다. <이소>는 굴원(屈原)이 나라를 걱정하며 울분을 글로 삭인 작품입니다.
<마음에 남은 글>
박제가는 책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해 자신만의 책으로 다시 만들었습니다. 9쪽
책을 읽다가 새겨 둘 만한 내용을 여기에 적어서 외우면 훨씬 잘 외워집니다. 그리고 제가 느낀 것과 생각한 것을 적어 두면 저만의 책이 됩니다. 28쪽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몸을 수고롭게 하며
굶주리고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어지럽힌다.
이는 그 사람을 노력하게 만들고 참을성을 길러 주어
이제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28쪽, (『맹자』 고자 하 15장)
세상에 궁금한 것투성이여서, 세상에 쓰고 싶은 글자가 너무 많아서 눈뜨면 붓 먼저 찾아 들고 집 안 구석구석, 골목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던 꼬마가 어느덧 열한 살이 되었습니다.
열한 살 인생은 다섯 살이나 일곱 살 때처럼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어요. 벽이랑 뒷간 모래에 글씨 쓰는 일이 마냥 즐겁던 시절은 계절이 가듯 지나가 버렸어요. 31쪽
사람들은 말이 많아지고, 아이는 생각이 많아지고, 어머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40쪽
"한 땀 한 땀 뜨다 보면 어느새 옷 한 벌이 지어진단다. 이걸 언제 다 짓나 생각하면 마음이 천근만근 같지. 그렇다고 해서 빨리 하려고 서두르면 비뚠 부분이 생겨 바느질을 다시 해야 하니 시간만 더 가기 마련이다. 언제 다 하지, 그런 생각일랑 아예 버리고 그저 묵묵히 한 땀 한 땀 짓는 게 제일이지." 40쪽
시련이 닥치면 그 사람의 바닥이 보인다. 털퍼덕 주저앉느냐, 시련을 딛고 일어서느냐, 넌 어떻게 할 테냐? 49쪽
"힘들었지?"
작은 책이 넌지시 말했어요.
"......."
"그래도 이 시간들이 너를 너답게 자라도록 이끌어 줄 거야."
"나를 나답게?"
"그래. 너를 너답게. 나를 보렴. 수많은 종이가 책이 되지만 나 같은 책은 없어. 조막만한 손으로 한 자 한 자 써서 엮은 책이 나 말고 또 어디에 있겠어? 너를 만났기에 내가 이런 책이 되었지. 남들이 보기엔 볼품없어 보어도, 나는 이런 내가 마음에 들어. 비단에 싸여 귀한 집 도령 댁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도 부럽지 않다고." 64~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