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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한문샘 Oct 09. 2022

김주현의 『고집쟁이 초정의 작은 책』(2014)

뜻밖의 큰 울림

읽은 날 : 2017.8.12(토)

다시 읽은 날 : 2017.8.23(수)​

쓴 날 : 2017.8.24(목)

면수 : 76쪽

* 5년 전 글을 다듬었습니다.


가끔 생각지 못한 곳에서 큰 울림을 만납니다. 고집쟁이 초정의 작은 책도 그랬습니다. 믿고 보는 김주현 작가님 책이라 더 반가웠습니다. 작가님 책에는 삶의 그늘을 다양한 방법으로 넘어선 사람들의 따함이 있습니다. 까막눈이 산석의 글공부, 간서치 형제의 책 읽는  읽다 뭉클하고 울컥했던 기억에 이번 책도 설레는 마음으로 열었습니다.


"햇볕에 책을 말리던 날 / 저녁에 다섯 살부터 열 살까지 내가 가지고 놀던 / 장난감 상자를 발견했다. (중략) 그리고 손바닥만한 책도 열 권 남짓 있었는데 (후략)"(2~3쪽) 누구나 한 번쯤 겪을 만한 이야기. 집안 정리하다 오랜 물건 찾으면 잠시나마 아련한 옛일에 빠져듭니다. 박제가에게는 그 물건이 책입니다.


"부지런히 글을 익혀라. 네가 읽은 문장들이 힘들 때 너를 지켜 줄 테니."(19쪽) 어릴 때 만든 책이 열한 살 박제가를 일으켜 세웁니다. 마음 맞는 글은 한 자 한 자 옮겨 쓰고 느낌과 생각은 다부지게 정리한 책. 어쩌면 평생 그러지 않았을까요. 막막한 현실에 좌절하다 읽고 쓰며 마음 털고 일어서는.


처음엔 책과 붓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다시 읽으니 부모님이 보입니다. 책 만드는 막내가 기특해 종이가 모자라면 아낌 없이 갖다 준 아버지, ​남편 없이 삯바느질로 하루하루 견디면서 방황하는 아들을 기다려 준 어머니. 그 사랑 넉넉히 받았기에 더 깊고 당당하게 자랐겠습니다.


* 박제가는 자신의 시집에서 호를 초정(楚亭)으로 삼은 까닭을 밝힙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초사(楚辭) 읽기를 좋아해 초정으로 호를 삼는다." 그는 초사] 중에서도 <이소(離騷)>를 가장 아꼈다고 합니다. <이소>는 굴원(屈原)이 나라를 걱정하며 울분을 글로 삭인 작품입니다.


<마음에 남은 글>


박제가는 책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해 자신만의 책으로 다시 만들었습니다. 9쪽


책을 읽다가 새겨 둘 만한 내용을 여기에 적어서 외우면 훨씬 잘 외워집니다. 그리고 제가 느낀 것과 생각한 것을 적어 두면 저만의 책이 됩니다. 28쪽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몸을 수고롭게 하며

굶주리고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어지럽힌다.

이는 그 사람을 노력하게 만들고 참을성을 길러 주어

이제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28쪽, (맹자 고자 하 15장)


세상에 궁금한 것투성이여서, 세상에 쓰고 싶은 글자가 너무 많아서 눈뜨면 붓 먼저 찾아 들고 집 안 구석구석, 골목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던 꼬마가 어느덧 열한 살이 되었습니다.

열한 살 인생은 다섯 살이나 일곱 살 때처럼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어요. 벽이랑 뒷간 모래에 글씨 쓰는 일이 마냥 즐겁던 시절은 계절이 가듯 지나가 버렸어요. 31쪽


사람들은 말이 많아지고, 아이는 생각이 많아지고, 어머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40쪽


"한 땀 한 땀 뜨다 보면 어느새 옷 한 벌이 지어진단다. 이걸 언제 다 짓나 생각하면 마음이 천근만근 같지. 그렇다고 해서 빨리 하려고 서두르면 비뚠 부분이 생겨 바느질을 다시 해야 하니 시간만 더 가기 마련이다. 언제 다 하지, 그런 생각일랑 아예 버리고 그저 묵묵히 한 땀 한 땀 짓는 게 제일이지." 40쪽


시련이 닥치면 그 사람의 바닥이 보인다. 털퍼덕 주저앉느냐, 시련을 딛고 일어서느냐, 넌 어떻게 할 테냐? 49쪽


"힘들었지?"

작은 책이 넌지시 말했어요.

"......."

"그래도 이 시간들이 너를 너답게 자라도록 이끌어 줄 거야."

"나를 나답게?"

"그래. 너를 너답게. 나를 보렴. 수많은 종이가 책이 되지만 나 같은 책은 없어. 조막만한 손으로 한 자 한 자 써서 엮은 책이 나 말고 또 어디에 있겠어? 너를 만났기에 내가 이런 책이 되었지. 남들이 보기엔 볼품없어 보어도, 나는 이런 내가 마음에 들어. 비단에 싸여 귀한 집 도령 댁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도 부럽지 않다고." 64~65쪽


몽당붓은 얼른 덧붙였어요.

"꽥꽥 소리치고 싶은 이 시간들을 잘 보내면 너는 더욱더 너다워질 거야."

"그래, 너는 너답게 살면 그만이지."

"달맞이꽃은 달맞이꽃으로 피면 그만이고, 애기똥풀은 애기똥풀로 피면 그만이지."

아이가 말했다.

"나는 나로 피어나면 그만이고."

"그렇지, 얼쑤!"

아이는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자세를 가다듬었습니다.

"그래, 지금부터 하는 공부는 나를 나답게 하는 공부다. 그렇지?"

아이는 몽당붓과 작은 책들을 보며 씩 웃었습니다. 66쪽

67쪽 그림. 시련을 딛고 훌쩍 자란 아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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