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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한문샘 Oct 09. 2022

한정주의 『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2016)

새롭고 인간적인

읽은 날 : 2017.5.31(수)~6.10(토)

쓴 날 : 2017.6.10(토)

면수 : 548쪽

* 5년 전 글을 다듬었습니다.


​#1 아는 게 아는 게 아니야


이덕무를 나름 안다 싶었는데 아니었습다. 깊고 맑은 선비, 책바보, 메모광, 문학가를 넘어 '전방위적 지식인'! 특히 18세기 백과전서파를 주도하고 청령국지와 <비왜론>으로 일본에 대해 세밀하게 정리한 부분은 이번에 새로 배웠습니다. 알면 알수록 감사하고 놀랍습니다. 날 잡아 청장관전서 다 읽고지 않습니다. 다음 글로 그를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마 평생 공부해도 새롭고 새롭겠습니다. 

"이덕무는 정조의 명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유고집이 간행될 정도로 조선 최고의 실력으로 인정받은 문장가이자, 저술 총서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통해 뛰어난 문장과 시문 비평 실력은 물론, 동아시아 삼국과 서양의 문물과 풍속, 국내외 여행기 등을 아우르는 가히 백과사전을 방불케 하는 방대한 지식의 보고를 남긴 위대한 지식인이었다."(7쪽)


#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0, 30대엔 마냥 완벽해 보였던 이덕무가 요즘 살짝 달리 보입니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보면 청나라에 다녀와서 겉멋 들어 박지원에게 충고 듣고(다행히 잘 받아들여 원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이문원에서 붓 가는 대로>에는 첫 벼슬에 들뜬 마음을 그답지 않게 가벼이 나타냅니다. 홍대용과 엄성, 반정균의 필담에 자기 생각을 덧붙인 천애지기서에선 '나도 당신들만큼 알아요' 느낌이 살짝 묻어납니다.


그런 그가 밉지 않습니다.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이덕무, 인간적이지 않은가요. 사실 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자신에게 너그럽지 못했고, 옛사람 이덕무에게서 삶의 방향성을 찾으면서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종종 좌절했습니다. 언제부턴 넉넉하고 털털한 사람이 되려 노력합니다. 쉽지 않지만 그러면서 조금 더 따듯해졌습니다. 나이 들며 가끔 잊어먹고 시덥잖은 농담으로 아이들을 웃기 일, 즐겁지 않은가요.


#3 이웃과 세상을 품은 공부

이덕무에게 공부는 나라와 백성을 돕기 위한 꿈이었습다. 평생 읽고 정리한 자료와 독서로 다듬은 안목은 관리가 되었을 때 적절하게 쓰입니다. 유득공이 정조의 명령으로 여진, 몽고, 일본, 유구의 군대 관련 책 쓰는데 규장각에 자료가 없습니다. 이때 이덕무가 공부하고 정리한 문서를 보내어 책을 무사히 완성합니다. "개인적 차원의 호기심과 탐구심에서 쌓은 지식이 관료 지식인이 된 이후 국가 차원의 사업과 정책 수립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542쪽)


서얼이라 세상의 그늘을 온몸으로 겪었던 이덕무는 가난한 백성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이덕무의 지식 탐구와 정보에 대한 열정의 근간에는 다름 아닌 '이용후생' 정신이 있었다. 이는 민간의 생활 도구나 기구 및 용품 등을 탐구하거나 기록할 때 그대로 나타났다."(315쪽) 속담과 속뜻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일본의 문물과 침략 가능성까지 글로 담아낸 사람,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이웃과 세상을 품고 지식의 공개념을 실천한 그에게 수를!


<마음에 남 글>


인문학적 인간은 문학, 역사,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의학, 과학, 기술 등 인간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주체적 시선과 사유로 이해하고 분석하려 한다. 9쪽


우리가 18세기의 인문학자 이덕무의 철학과 삶의 자세를 배운다는 것은 곧, 화석화된 과거를 읽는 것만이 아니라 생동하는 현재를 읽는 것이기도 하다. 15쪽


이덕무에게 창작의 원동력은 다름 아닌 진정성이다. 36쪽 ​


자신의 천진하고 순수한,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면 될 뿐 37쪽


견문과 지식을 쌓더라도 동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만약 동심을 잃어버린 채 견문과 지식에만 의존해 글을 짓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옮겨 적은 '가짜 글'에 불과할 뿐이다. 39쪽


어린아이와 처녀의 눈과 마음으로 본다면 인간사와 세상 만물은 모두 창작과 창조의 놀이터다. (중략)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사소하거나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것들도 어린아이의 천진함으로 본다면 즐거운 놀잇거리고, 처녀의 순진함으로 본다면 기이한 장관이요 구경거리가 된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세상사 모든 것이 창작의 훌륭한 소재가 된다. 45쪽

그(이덕무)에게는 오로지 매미의 깨끗함과 귤의 향기로움을 간직하려는 맑고 맑은 마음이 존재할 뿐이다. 82쪽 ​


이덕무는 무엇을 이루거나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욕망에 따라 충실히 독서할 따름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목적도 계산도 없고 단지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열정적인 탐구만이 있을 뿐이다. 98쪽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재미있게 보고 지나칠 광경이지만 그는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켜 각종 문헌과 서적을 뒤져 마침내 그 행동의 기원까지 고증해낸다. 116쪽


좋은 문장이란 자연스러움과 천진함이 온몸에 스며들어 자신의 감정과 마음이 가는 대로 언제 어느 곳에서나 글이 나올 때 이루어진다. 170쪽


이덕무는 자신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감동을 준다면 그 시를 지은 사람의 시대와 국적,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공정하게 평가했다. 183쪽 ​

예부터 선비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사귀는 일을 인생의 가장 큰 행운으로 여겼다. 이덕무와 박제가의 사이가 그랬다. 252~253쪽


역사란 사라지는 것이 있으면 태어나는 것이 있고 태어나는 것이 있으면 사라지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역사의 시간적 공간적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결국 모두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 281쪽


​의복은 사람의 기본 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의식주 가운데 가장 변화가 심하고 변동이 잦아 그 원형과 유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까닭에 의복 문화는 각종 문헌과 서적을 뒤져 사물과 일의 기원을 증명하는 한편 민간에서 보고 듣고 겪은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이덕무의 고증 혹은 변증, 그리고 실증의 방법이 제일 빛을 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297쪽


여름 끝과 초가을이 만나는 때 夏尾秋頭接(하미추두접)

며칠째 산뜻하고 맑은 날 新晴才數日(신청재수일)

해질녘 회화나무에 매미 한 마리 一蟬凉槐多(일선량괴다)

시원스레 모인 일곱 사람 ​ 修然作者七(수연작자칠)


​324쪽, <칠석 이튿날 서여오, 유연옥, 운옥, 혜보, 윤경지, 박재선과 함께 삼청동 읍청정에서 놀다가 짓다> 중 8수


​눈은 밝게 하고 손은 민첩하게 놀려야 한다. 338쪽, 사소절, '부의' 1, <복식>


사소절은 단지 신분에 대한 예절이 아닌 인간에 대한 예절의 철학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54~355쪽 ​


민중의 삶과 생활을 제대로 담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말을 알아야 한다. 특히 속담과 방언은 문화와 역사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특정 시대나 지역 민중의 독특하고 고유한 삶과 생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18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들은 이전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작업, 즉 민중의 말을 문자에 담고자 하는 혁신적인 시도를 했다. 이익의 백언해(百諺解)와 이덕무의 열상방언(冽上方言) 그리고 정약용의 이담속찬(耳談續纂) 등이 바로 그것이다. 357쪽


이덕무는 속담의 기록과 더불어 그 속뜻까지 알기 쉽게 해설해 놓았다. 359쪽


북학파 지식인들에게 연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일찍이 자신들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연구한 북학의 큰 뜻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377쪽

우리는 북학파 지식인 그룹이 북학의 큰 뜻을 공유하면서도 각자 특정 분야에서 독자적으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의산문답을 저술한 홍대용은 천문지리와 과학에서, 열하일기를 지은 박지원은 문장에서, 북학의를 쓴 박제가는 사회 개혁론에서, 발해고를 저술한 유득공은 역사 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덕무는 어떠했는가? 그는 청장관전서라는 동양과 서양, 고대와 당대를 아우르는 백과사전적 지식 탐구의 저술을 남겨 당시 최신 학문이었던 고증학과 변증론 및 박물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펼쳐보였다. 380~381쪽


이덕무는 선진 학문과 지식 역량을 갖춘 외국의 지식인과 우정을 쌓고 교제하는 것이야말로 북학의 진정한 뜻이라 여겼다. 407쪽


이덕무와 그의 동료들은 일본의 변화와 발전을 제대로 직시하고 조선 또한 이에 걸맞게 사회 경제 체제를 변화시키고 군사적, 외교적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인식이 담겨 있는 책이 바로 청령국지다. 440쪽


이덕무가 일본을 탐구하고 연구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의 변화와 발전상을 제대로 알아야 조선을 바로잡을 수 있고, 일본에 대한 올바른 대책을 세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득공의 말처럼 이덕무가 일본을 연구한 목적은 "박식함을 바탕 삼아 특이한 견문을 넓히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과 "국경을 벗어나 사신으로 가는 사람"이 참고로 삼을 만한 유용한 자료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465쪽


마땅한 땅이 있으면 거친 들판이라도 나무를 심었다. 약간의 빈 땅도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468쪽, 청령국지, '풍속', <도로>


​여기(청령국지)서 이덕무는 당시 일본이 교역하고 있던 35~36개국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함께 교역 물품까지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480쪽 (중국, 동남아, 인도, 페르시아... 스페인까지!)


당시 이덕무의 책만큼 바다 밖 외국에 관해 많은 정보를 소개한 서적은 없었다. 484쪽


그는 (중략)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해야 할 일만 좇아 본분을 지키며 역할을 다했다. 5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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