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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한문샘 Oct 11. 2022

정민의 『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2016)

정갈하고 먹먹한

읽은 날 : 2016.1.27(수)  

쓴 날 : 2016.1.28(목)

면수 : 270면

* 6년 전 글을 다듬었습니다.


책마다 결이 다릅니다. 신영복 선생님 『담은 천천히 밑줄 치며 읽습니다. 담론 앞에 앉으면 경건해집니다. 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는 정갈하고 깨끗한 게 왠지 책에 줄 그으면 안 될 듯합니다. 독서공책에 인상깊은 구절과 제 생각을 메모하며 읽습니다. 신정철 선생님 표현대로라면 '메모 리딩(memo reading)'.


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는 <정민의 세설신어> 칼럼을 모은 책입니다. 『일, 조심에 이어 세번째입니다. 정민 선생님의 표지 글씨가 연둣빛 배경과 어울립니다. "옛글에서 큰 울림이 담긴 장면을 길어 올려 우리에게 깊은 통찰과 넓은 안목을 전하는 이 시대의 인문학자." 작가 소개에서 편집자의 감각을 읽습니다. '이 출판사, 책 정말 잘 만든다!' 게다가 책에 오탈자가 거의 없습니다. 띄어쓰기 하나 틀린 정도?    

차고술금(借古述今). 옛일에서 빌려와 지금을 말하는 건 정민 선생님 책의 전반적인 흐름입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역사는 늘 쳇바퀴처럼 돌아갑니다(4쪽). "옛날이 답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묵직한 말씀의 힘은 시간을 뛰어넘는다. (중략) 인간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으므로 그때 유효한 말은 지금도 위력적이다."(5쪽) 한문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수없이 느낀 부분이라 깊이 공감하며 읽습니다.

신문 연재글의 특성상 선생님의 다른 책보다 구어체가 많습니다. 거칠다 싶은 표현도 가끔 보이지만, 시대를 안타까워하고 사람과 자연을 아끼는 마음이 행간에 묻어납니다.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에 담긴 풍경이 불도저와 포클레인에 파헤쳐진 모습(70쪽)은 읽을 때마다 먹먹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진지하지는 않아, 가끔 툭툭 던지는 말씀에 씨익 웃습니다.    


* 책 뒤편을 보면 제본한 곳이 ‘정민문화사’입니다. 우연의 일치?   


<마음에 남은 글>

지금 막막하고 앞이 캄캄하면 안 보이는 앞으로 더 나갈 게 아니라 뒤를 돌아보는 것이 맞다. 거기에 답이 있고 미래가 있으니까. 옛글에 무선 랜은 없었지만 생각이 힘은 광속으로 펄펄 날았다. 인터넷이 아니라도 통찰은 반짝반짝 빛났다. 5쪽

귀가 먹어 큰 소리로 말하는 귀머거리를 그(박지원)는 '소곤대기를 즐기지 않은 사람'이라 불렀다. 눈이 멀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라 하는 대신 '남의 흠을 보지 않는 이'라고 말했다. 혀가 굳고 목소리가 막혀 말 못하는 사람을 벙어리라 하지 않고 '남 비평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또 등이 굽은 곱사등이는 '아첨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평했다. 21쪽
-> 작년에 정조의 ‘천하에 재능 하나 없는 사람은 없다(天下無無一能之人)’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세상과 만나는 1평의 선물> 영상 두 편을 같이 보았습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작은도서관을 준비하는 사람들 이야기였는데, 이 글 읽으면서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주고받은 말과 생각이 떠올라 울컥할 뻔했습니다.


지영수겸(持盈守謙) : 가득참을 유지하면서도 겸손의 뜻을 잊지 않음 58쪽, 육수성


다스림은 어진 이를 나아가게 하고 부족한 자를 물러나게 하는 데 달렸다. (治係於進賢退不肖也.) 134쪽, 위징


사람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으면 무료불평에 빠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무료불평을 꾹 눌러 이것을 창조적 에너지로 쏟아부을 때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151~152쪽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을 만한 틈이 생기면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 (雖於劇奔忙中, 有可讀一字暇, 便宜讀一字.) 164쪽, 홍석주


하루의 절반은 고요히 앉아 내면을 기르고, 나머지 반은 책을 읽을 때 쓴다. (半日靜坐, 半日讀書.) 168쪽, 주자


작은 것에서 시작해 큰 것에 도달하고, 거친 데서 나아가 정밀함에 다다른다. (由小而至大, 由粗而至精.) 178쪽, 박영


보석 같은 시간이 반짝반짝 빛나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이다. 195쪽


쓸모 없는 것의 쓸모 있음을 지속적으로 갈파한 다산의 가르침에서 인문 정신의 한 희망을 본다. 204쪽


다산은 유배지의 척박한 환경을 하늘이 주는 기회로 알고 학문에 몰두했다. (중략) 벼슬길에서는 결코 꿈꿀 수 없었던 금쪽 같은 독서의 시간을 하늘이 특별히 허락해 준 것으로 알고 이 시간을 달고 고맙게 받았다. 229쪽


틈날 때마다 옛글을 읽으면 내 글 속에 절로 옛글의 풍격이 스며든다. (使古文時在唇吻間, 則出詞吐氣, 自有古風.) 241쪽, 원황  


한 번에 한 가지씩 하나하나 쌓아나가야 그 하나하나가 모여 오롯한 전체가 된다. 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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