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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한문샘 Oct 11. 2022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2004)

20대 중반을 환하게 밝힌 책

읽은 날 : 2004.6.26(토)~6.28(월)

쓴 날 : 2012.4.2(월)

면수 : 333쪽

* 10년 전 도서관친구모임 발제자료를 다듬었습니다.


저의 20대 중반을 환하게 밝힌 책입니다. 제목이 독특하지요?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한다는 말입니다. 글쓴이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열정과 광기를 연구하면서 역사의 행간에 숨은 영웅들을 오늘날의 언어로 복원하려 했습니다. 죄인, 역적, 서얼, 기생, 화가...... 그 시대의 비주류였지만 절망 속에서 성실과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우뚝 세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저는 김득신(1604~1684)과 이덕무(1741~1793) 이야기를 자주 찾아 읽습니다.


김득신은 <독수기(讀數記)>에 평생 만 번 이상 읽은 글 36편의 목록을 정리하고 어떤 글은 1억 1만 3천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때 1억이 지금의 10만임을 감안해도 엄청난 횟수입니다. 그는 열 살에야 글을 배우고 스무 살이 넘어서야 글 한 편을 썼지만, 화내지 않고 되풀이해 가르친 아버지의 믿음에 힘입어 밤낮없이 공부해 늘그막에는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기웃대지 않고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성실한 둔재(67쪽)!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을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입니다.


"오늘 그가 나를 압도하는 대목은 호한한 독서와 방대한 저작이 결코 아니다. 그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맑은 삶을 살려 애썼던 그의 올곧은 자세가 나는 무섭다. (중략)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알아줄 기약도 없는 막막함 속에서도 제 가는 길을 의심치 않았던 그 믿음이 나는 두렵다."(81쪽) 이덕무! 서얼이라 그 시대 최고의 학자여도 벼슬할 수 없건만 책 수만 권을 읽고 수백 권을 베껴 쓴 책벌레. 20대 초반에 처음 만난 그는 늘 저를 부끄럽게 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그의 깊고 맑고 파란 마음, 눈물빛 순수함이 오늘따라 더더욱 그립습니다.


<마음에 남은 글>


누구에게나 자신의 시대는 자못 격정적이다. 이 격정 앞에 온몸을 내던져 맞부딪쳐 나가는 사람이 있고,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이 있다. 뼈아픈 시련을 자기 발전의 밑바대로 삼아 용수철처럼 튀어오른 사람과, 한때의 득의가 주는 포만감에 젖어 역사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버린 사람도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이들은 모두 전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5~6쪽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癖)이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고 박제가는 힘주어 말한다. 미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홀로 걸어가는 정신이란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이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것저것 따지기만 해서는 전문의 기예, 즉 어느 한 분야의 특출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벽이다. 17-18쪽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번 척 보고 다 아는 천재도 있고, 죽도록 애써도 도무지 진전이 없는 바보도 있다. 정말 갸륵한 이는 진전이 없는데도 노력을 그치지 않는 바보다. 끝이 무디다 보니 구멍을 뚫기가 어려울 뿐, 한 번 뚫리게 되면 크게 뻥 뚫린다. 한 번 보고 안 것은 얼마 못 가 남의 것이 된다. 피땀 흘려 얻은 것이라야 평생 내 것이 된다. 51쪽


부족해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어느 순간 길이 열린다. 단순무식한 노력 앞에는 배겨날 장사가 없다.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 동안 내용이 골수에 박히고 정신이 자라, 안목과 식견이 툭 터지게 된다. 한 번 터진 식견은 다시 막히는 법이 없다. 한 번 떠진 눈은 다시 감을 수가 없다. 65쪽


옛사람들은 김득신의 노둔함을 자주 화제에 올렸지만, 그 속에는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외경(畏敬)이 담겨 있었다. 지금도 세상을 놀래키는 천재는 많다. 하지만 기웃대지 않고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성실한 둔재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한때 반짝하는 재주꾼들은 있어도 꾸준히 끝까지 가는 노력가는 만나보기 힘들다. 세상이 갈수록 경박해지는 이유다. 67쪽


그(이덕무)의 편지글에 보면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지요"라는 구절이 있다.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이다. 인터넷 시대에 세계의 정보를 책상 위에서 만나보면서도 천하의 일은커녕 제 자신에 대해서조차 알 수가 없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나는 없고 정보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소유한 정보의 양이 늘어갈수록 내면의 공허는 커져만 간다. 주체의 확립이 없는 정보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82쪽


그 처참한 가난과 신분의 질곡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던 맹목적인 자기 확신, 독서가 지적 편식이나 편집적 욕망에 머물지 않고 천하를 읽는 경륜으로 이어지던 지적 토대, 추호의 의심없이 제 생의 전 질량을 바쳐 주인 되는 삶을 살았던 옛사람들의 내면 풍경이 나는 그립다.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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