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by 스마일한문샘

하늘과 땅이 맞붙은 듯,

어슴푸레한 게 수묵을 풀어 놓은 듯

드넓고 출렁거린다.

누가 이렇게 진한 물방울을 만들었을까?

- 이덕무, <칠십리설기(七十里雪記)>


天與地襯, 黯澹敍水墨狀, 滉且漾.

천여지친, 암담서수묵상, 황차양.

孰爲是濃沫?

숙위시농말?


* 『청장관전서』(한국고전번역원)와 『책에 미친 바보』(권정원)를 참고하여 다시 번역했습니다.


눈 온 다음날 걸어서 출근했습니다. 폭설에 택시 없어 자박자박 걸었습니다. "오늘 출근 시간은 9시로 조정합니다." 교직원 단톡방 봐도 마음이 바쁩니다. 미끄럽고 질퍽이는 보도를 조심조심 지나 큰길까지 왔습니다. 사람이 덜 걸은 듯 하얀 길을 푹푹 밟다 '<칠십리설기(七十里雪記)>도 그랬겠지?'


<칠십리설기>는 이덕무가 1763년 12월 22일(음력)에 충주 가며 쓴 글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기행문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 글에는 여정도 없고 감회도 없다. 아무런 교훈도 없다. 그저 온통 새하얗게 눈 덮인 세상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권정원, 『책에 미친 바보』, 232쪽)


늘 진지한 이덕무가 이 글에선 밝고 산뜻합니다. 흩날리는 눈송이가 반가워 하늘 보며 입 벌려 받아 먹고, 왼쪽 눈썹에 눈이 쌓여 크게 웃다 말에서 떨어질 뻔합니다. 호랑이 닮은 바위에 겁먹은 말이 끙끙거리자, 빙그레 웃으면서 말 가는 대로 몸 맡기며 70리 길을 갑니다. 스물세 살 수염 없는 이덕무가 웃고 또 웃습니다. 읽는 저도 마음이 환해집니다.


무엇보다 눈 쌓인 들판에서 진한 물방울을 읽어내는 감성이 반갑습니다. 황혼을 앞둔 어슴푸레함은 수묵을 풀어 그린 풍경 같습니다. 눈길 앞에선 가난도 설움도 잊습니다. 풋풋한 젊음, 맑고 섬세한 눈빛이 있을 뿐입니다. 어제 첫눈 왔단 지인들 말씀에 올해 1월 폭설과 258년 전 옛글을 다시 읽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도 첫눈이 오면 무엇을 닮았을까 찾아보렵니다.

사진은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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