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축복

by 스마일한문샘

해마다 수첩 한켠에 봉투를 끼웁니다. 사진관에서 주는 비닐봉투 안에는 고3에서 어른으로 발돋움할 즈음 받은 글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반으로 접은 엽서와 연분홍빛 봉투 가장자리는 약간 나달나달하지만, 오랜 기억을 조심조심 펼쳐 들면 그 때 그 풍경이 사르르 다가옵니다.

수능 전날 은사님께 초콜릿과 엽서를 받았습니다. 파랑 플러스펜으로 한 자 한 자 쓰신 글은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최대한 발휘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기원한다." 고1 중간 담임이면서 3년 동안 한문을 가르치신 선생님이셨습니다. 수능 가채점하고 눈이 붓다 시무룩한 날 "그 정도면 잘 봤으니 본고사 준비 열심히 하자." 덕분에 툭툭 털고 논술, 수학, 영어 공부에 마음을 모았습니다.

1월 하순, 한문학과 합격 소식 듣고 부모님 다음으로 가장 먼저 전화드렸습니다.

"자전은 샀니?"

"아직 안 샀어요. 학과에서 단체로 산다고 합니다."

"좋은 자전 있는데 학교 올 때 받으렴."

그렇게 졸업 직전 개학날 받은 자전. 포장을 열어 보니 민중서림 한한대자전과 연분홍빛 봉투가 툭! 하얀 바탕에 은빛 난초가 새겨진 카드에는 세라믹 펜으로 쓰신 글자가 또박또박.

"한문학과 합격을 축하합니다. 부디 훌륭한 한문학자, 선생님이 되도록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라고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길!" 그때부터 수첩 한켠에 엽서와 카드를 담았습니다. 그냥 끼우면 닳을 것 같아 사진 넣는 봉투에 살짝 담았습니다. 공부가 잘 안 될 때, 첫마음이 아득할 때 오랜 말씀 열어 보면 옛글 읽듯 잔잔해졌습니다.

한문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건 맞는데 '훌륭한' 세 글자는 한참 멀어 보입니다. 아주 오랜 꿈의 씨앗은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때 선생님보다 더 나이 든 지금은 마지막 줄을 오래 읽습니다. 어쩌면 그 말씀이 저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이지 않았을까요. 그 마음 깨닫는 데 25년이 걸렸습니다.

아주 오랜 카드 두 장. 하나는 수능 전날, 하나는 자전과 함께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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