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시대가 참 불안하다. 계속되는 경제위기의 소식이나, 정치적 논란거리가 쏟아지는 것은 둘째치고 가까이에서 깊은 한숨소리가 들린다. 친구들은 취업난에 시달렸고, 앞으로의 미래를 걱정했다. 엄마는 돈을, 아빠는 젊은 층과 노년 층에 끼어버린 슬픈 사오십대의 현실을 개탄했다. 일하는 곳에서 마주친 경로 할아버지는 잃어버린 직장에 대해 허전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공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 역시도 내가 살아가야 할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쓴웃음 지으며 하루를 살아가는 걸 보면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요즘 말로 '존버'.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글로 행복하고 싶다는 뜨거운 포부를 안고 입학한 대학, 인문학에 대한 애정 하나로 멋 모르고 뛰어든 대학원, 그 끝은 늘 불안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난 내가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내고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기약 없는 물음이 걸려있다.
꼭 지금 순간만이 아니어도, 나는 불안이라는 감정에 쉽게 현혹되는 편이었다. 계절이 바뀌거나 날씨가 변할 때, 심지어 카페에서 들려오는 음악이 변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누군가가 감정의 스위치를 바꿔놓은 듯, 기분이 오락가락하였다. 좋게 말하면 감정에 솔직한 편. 나쁘게 말하면 너무나도 쉽게 감정에 몸을 내어주는 편. 불안은 늘 나를 잠식했고, 자존감을 갉아먹었고, 인생의 가장 못난 나날들을 연장시켰다.
왜 불안에 떨고 있을까?
불안에서 우울로 향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나는 일상마저도 무너져버리는 이 감정 안에서 빠져나가야 했고, 도망치고 싶었다. 불안을 떨쳐내는 방법을 찾아보고 명상이라느니, 걱정거리를 글로 적어 하나씩 지워본다느니 심지어는 불안에 완전히 빠져보는 것까지 모든 방법을 시도해봤지만 불안은 여전했다. 늘 조바심 내는 내 자신이 미웠고 그때마다 알 수 없는 강박에 시달렸다. 나에게는 늘 채찍질이 가해졌고, 당근은 없었다. 흔들리는 나에게는 나의 공간, 온전히 나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세상을 내다보는 안전지대를 가지는 것이며,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파악하는 것이며, 그리고 특정한 어딘가에 의미 있는 것에 정신적으로 심리적 애착을 가지는 것
(에드워드 렐프,《장소와 장소 상실》, 논형,2005)
내가 점차 나아지기 시작한 것은 제 나이로 살아가면서부터다. 우스운 얘기일 수 있지만 빠른 년생인 나로서 제 나이로 산다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소위 족보 브레이커로 읽히는 내 나이는 타인들에 의해 많아졌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고, 살아온 나의 시간들은 늘 소외되었다. 늘 불안에 떨던 나는 가장 먼저 내 나이를 되찾아 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나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잘하는 것과 못 하는 것, 좋아하는 음악과 날씨, 하루 일과를 보내는 방식과 살아가는 컨디션. 하나씩 차근차근, 온전히 나를 위해서 하루하루 죽어가고 살아냈다. 그렇게 나만의 장소감을 찾아나갔다.
불안이 잠식해 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대부분 정해지지 않은 불확정성 안에서 장소에 머무르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 때문에 줄곧 누군가와 닮으려 하고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그렇게 정체성을 잃고 스펙을 쌓으며 정해진 길을 바삐 쫓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심리적 안정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표면적 안정을 좇을 수밖에 없다. 눈에 띄는 그 안정선 안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불안하거나, 도태되거나, 손가락질받는다. 나 역시 그랬던 것처럼.
사회를 점유하면서 진정한 장소감을 얻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속한 이 사회는 늘 유동적이고 아주 빠르게 불안의 골로 우리를 데려다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풍파도 막아낼 수 있는 오로지 나를 위한 장소, 나만의 안전지대가 필요한 법이다. 그것이 화려하게 번쩍이는 아파트이거나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번듯한 직장을 갖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외부에서 찾는 나의 장소감은 변화하는 사회 안에서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일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물적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내린 뿌리는 언제라도 타인에 의해 훼손될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또 다시 흔들리는 일상이 찾아올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내가 머무르고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은 나에게 있다. 오로지 나에게 집중할 때, 의존하고 애착을 갖게 되는 존재가 '나'로 향할 때, 우리는 이 사회에서 진정한 안정감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향점에 도달한다. 그렇게 천천히 나의 장소감을 차지하다 보면 사회 속에 만연해있는 상실의 지점에 도착하더라도 불확정성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사소한 일에도 흔들리고 불안을 겪고 있다면, 그 불안을 멈추고 편안함을 찾고 싶다면 우선 나를 먼저 바라보자. 천천히 내면의 장소를 넓혀가면서 평안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