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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Aug 11. 2021

트렁크 팬티, 슬기로운 집콕 생활


쾌적한 집콕 생활을 위한 아이템이 하나 늘었다. 그것은 바로 트렁크 팬티.

수술 때 마른 제모로 바짝 깎인 털이 자라며 까끌거리고 따가운 느낌을 견뎌야 했던 나. 집에서 편안한 면팬티를 즐겨 입었음에도 몸에 달라붙는 느낌을 견뎌낼 수 없었다. 건조기를 사용하면서 면 종류 속옷들이 작아지는 느낌도 한 몫했고.




유난히 까끌거림을 견뎌내기 힘들던 어느 날 밤, 이쪽저쪽으로 돌려 누워가며 답답하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무럭무럭 자란 뱃살도 팬티 고무줄 위로 빼꼼 올라와, 보는 것만으로도 속옷이 작게만 느껴지는 날이었다. 애꿎은 이불을 꽈배기처럼 다리사이에 돌돌 말아가며 한숨 쉬던 그날, 남편이 자신의 트렁크 팬티라도 입어보지 않겠냐는 솔깃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 진짜? 입어봐도 돼?





남자 트렁크 팬티 디자인은 어딘가 용납할 수 없는 색과 패턴들로 뒤덮여 있다. 그동안 빨래만 해줄 땐 몰랐는데 막상 내가 입는다고 생각하니 뭘 골라야 할지 망설여졌다. 몸에 달라붙는 드로즈 팬티는 단색인 경우가 많은데 펑퍼짐하고 편안한 트렁크팬티 디자인일수록 이 현란한 패턴이 심한 듯싶다. 평소엔 내가 입을 거란 생각은 0.1g도 안 했는데, 막상 입으려고 보니 대체 어떤 디자인을 골라야 할지..


남편의 속옷 서랍을 열어 여러 팬티들을 보다가 그나마 귀여운 여름용 파란색 땡땡이 팬티를 골랐다. 생각해보면 이 팬티, 그나마 귀엽다며 내가 골라줬던 듯. 이런 날을 대비해서 골라줬던 건가? 그래! 어디 한 번 입어나 보자!




처음으로 입어본 남자 트렁크 팬티. 어, 이 느낌 무엇? 너무나 편안하고 쾌적하다. 이건 마치 팬티를 거의 안 입고 자는 느낌이었다. <아담과 하와>의 '하와'가 된 느낌? 그저 자라나는 털과 속옷의 마찰만 피해도 살 것 같았는데 이건 아무 느낌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극강의 편안함에 남편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오빠! 이 팬티 대박이야! 근데.. 왜 그동안 여자용 트렁크 팬티는 볼 수 없었던 거지? 모르겠다, 그냥 이거 한 장만 입어보지 뭐!




그때부터 난.. 야금야금 남편의 트렁크 팬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까 골랐던 파란색 땡땡이 팬티만 입기로 약속했었는데, 가끔이 아니라 매일 입고 싶어진 내 마음. 하나로는 충족될 수 없었다. 매일 빨래하긴 번거롭고 최소 3장은 있어야 맘 편히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트렁크 팬티는 스며들듯 내 일상으로 들어왔고, 난 트렁크 팬티와 사랑에 빠졌다.




마침 해외출장 중이던 남편. 통화 중에 솔직히 이실직고했다. 나 오빠 팬티 더 입고 싶은데, 요즘 몰래 여러 개 입고 있으니까 파란 땡땡이 말고 공식적으로 하나 더 줘.






당연히 나도 여자용 트렁크 팬티를 찾아보았지만 내가 원했던 쾌적한 너비의 팬티는 아니었다. 좀 더 붙고, 작고, 그런 느낌? 그런데다 가격도 훨씬 비싸기까지. 비싸도 첫 번째로 원하는 조건인 쾌적함이 충족되고 색감까지 곱다면 한 번 사 볼 의향이 있었으나,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팬티 유목민으로 살다가 추천받은 트렁크 팬티가 있었으니. 자주 검색한 뒤로는 알 수 없는 검색엔진의 알고리즘을 타고 여성용 트렁크가 핸드폰, 모니터에 종종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단 색감이 고왔고 후기까지 좋아서 귀가 팔랑팔랑 했다. 남자용 트렁크 팬티보다 가격대가 좀 있어서 의심병이 돋아 더 꼼꼼히 정보를 찾아보았다. 팬티에 쓴 돈으로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던 마음.






마침 바로 결제버튼을 누르라는 듯 할인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고, 후기를 찾아볼수록 마음이 끌려 귀가 펄럭이다 못해 아기 코끼리 덤보처럼 날아가게 생긴 나는 결국 3장 세트 결제를 마쳤다. 팬티야! 어서 와!


그렇게 도착한 팬티들. 아이스크림처럼 달달한 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각거리는 재질이라 빨래할 때도 남편 트렁크 팬티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소중함이 느껴져 건조기도 돌리지 않았다. 집에서 활동할 때, 잘 때는 꼭 이 팬티를 입는데, 요새는 와이드 데님을 즐겨 입어서 안에 이렇게 펄럭이는 팬티를 입어도 동네 산책 정도는 핏에 큰 무리가 없다. 그렇다. 지금도 입고 있는 것이다!





집콕 생활의 동반자가 되어버린 나의 트렁크 팬티. 아주 마음에 든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보여줬더니, 왜 남자 팬티는 이렇게 괜찮은 게 없냐며 남자용은 안 파냐고 물어보았고- 같은 사이트에서 검색해보니 결국 또 파란색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남자 트렁크는 아직 디자인에 대한 수요가 덜한가 보다.


요새는 단지 예쁘기보단 편안한 옷을 많이 찾는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런 추세이다. 코로나 때문에 이 경향이 더 짙어지는 느낌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여자용 트렁크 팬티도 합리적인 가격에 예쁜 제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한동안 옷차림이 얇아져 그에 맞는 속옷들로 입다가 요 며칠 다시 트렁크 팬티를 꺼내 입었더니 다시 만난 이 편안함, 쾌적함! 집에서 작업하는 내게 너무 딱이다. 집에서 작업할 때는 그냥 반바지처럼 트렁크 팬티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을 때도 있다. 넉넉한 사이즈에 색이 예뻐서인지 남편은 내가 반바지를 산 줄 알았다고 했지만- 아니야, 이거 팬티야. 정말이지 트렁크 팬티 만만세다. 따봉. 따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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