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해외입양아 가족.'
이번 여행은 참으로 희한했다. 여행의 시작부터 사이클론이 뉴질랜드 북섬으로 다가오더니 내가 여행하는 내내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은 채 북섬 옆에서 둥둥 떠있으면서 나의 여행을 함께 해주었다. 지금까지의 나는 날씨요정으로 어디를 가던지 화창한 날이 훨씬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번 여행은 완전히 빗나갔다. 아무래도 날씨요정의 에너지는 북반구에서만 통하는 듯싶다. -_-
사실 나나 요하네스나 엉덩이가 그리 가벼운 사람은 아니기에 일단 여행을 가면 호텔이건 호스텔이건 아침 8시 반 정도에 부스스 일어나서 10시까지 뭉그적뭉그적 거리다가 아침을 먹고 11시나 12시쯤 어기적 어기적 근처를 둘러보는 편이다. 둘 다 여행은 유명한 곳을 관광하는 것이 아닌 그 과정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한다. 어쩌면 게으른 자의 변명일 수 있다. 그리고 엉덩이가 가벼운 분들이 보면 환장할 스타일이긴 하다 ㅎㅎ 어쨌든 이런 성향이기에 여행 중 비바람이 몰아친다 한들 우리의 일정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 어찌 보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신기하게도 이번 만남의 대부분은 한국인 또는 한국이랑 관련이 있는 분들이었다. 북섬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
<로토루아(Rotorua) 래프팅 폭포에서 만난 한국인 해외입양아 가족>
로토루아는 온천과 자연, 그리고 7미터 폭포에서 떨어지는 래프팅으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래프팅이 궁금해서 방문했다. 체험이 아닌 구경만 하러 간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래프팅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분과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한국에 산다는 것을 듣자 자기 옆에 있는 아들을 가리키며 "내 아들이 한국에서 왔어"라고 이야기를 했다. 아들이 한국인 해외입양아였다. 그 가족은 호주에 살고 있는데, 아들이 힙합 댄스에 빠져 작년에는 미국의 댄스 대회에 참가했고, 뉴질랜드는 전날 오클랜드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하느라 방문했다고 한다. 아들이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요하네스가 갑자기 그 아들에게 "Can you speak Korean?"이라고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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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대 때 InKAS라는 국제한국입양인봉사회에서 꽤 오랫동안 봉사를 했었다. 그곳의 정애리 회장님은 '목포 공생원' 원장님의 딸로, 그분이 어릴 때 보육원의 많은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을 갔다고 한다. 그러다 그 입양인들이 성인이 되어서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한국에 돌아와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돕기 위해 인카스를 만드셨다고 했다.
몇 년간 그곳에서 봉사를 하면서 여러 해외입양인들을 만났다. 그때 만난 덴마크 친구가 그녀의 한국 부모님을 만날 때 통역을 요청해서 해준 경험도 있다. TMI로 그 만남에서 눈물을 펑펑 흘린 사람은 내 친구도, 그녀의 한국 부모도 아닌 나뿐이었다;; 엄마를 찾았는데 엄마가 만나길 거부해서 두 번 버림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간 친구도 있었다. 네덜란드 입양인 친구는 한국에 왔을 때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아무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것을 보고 굉장히 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인들 사이에 있는 백인을 볼 때 자기가 그를 돌아보는 모습이 신기하다고도 했다.
해외입양인 몇 명과 친했기에 나는 그들만의 형용할 수 없는 묘한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한국인 입양인들에게 'Can you speak Korean?'이라고 묻는 거 자체가 안 그래도 복잡한 심경에 큰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런데 요하네스가 딱 저 질문을 한 것이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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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의 질문에 그는 어색하게 "안.. 녀.. 하... 세.. 요"라는 한마디만 남긴 채 서둘러서 자리를 떠났고, 결국 우리와 그의 부모님만 남아 폭포에서 떨어지는 래프팅을 기다리며 20분간 더 대화를 이어갔다.
그의 아버지가 말하길 자기랑 와이프가 한국을 한 번 방문했었는데 그때 너무 좋았었기에, 두 번째로 방문해서 10개월 된 아들을 입양해서 왔다고 한다. 그때 그는 이미 말을 곧잘 했었고 잘 걸어 다녔다고. 그리고 아들이 7살 때 다시 한번 한국에 갔는데, 그가 한국인들을 바라보며 신기해하는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걸 보며 자기 아들은 자신을 호주 백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아들이 10대가 되면서부터 힙합댄스에 관심을 갖고 열정을 다하여 연습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작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댄스대회에 참석을, 올해는 오클랜드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을 했다고 한다. 아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댄서가 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굉장히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의 아들이 호주 백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아이가 숨길 수 없는 한국인의 DNA로 춤을 추고 있다는 생각을 조금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여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인들이 춤을 잘 추는 DNA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니? 춤뿐 아니라 노래 같은 예술적인 끼가 많거든. 거기에 퍼포먼스에도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그러자 그의 엄마가 물었다. "너 지금 K-pop을 이야기하는 거니?"
"K-pop 말고 그냥 한국인들의 전반적인 DNA를 말하는 거야. K-pop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닌, 우리의 끼를 이용해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생각해. K-pop이 나오기 전에 b-boy가 있었어. 아들한테 말해줘. 유튜브에서 Korean b-boy를 찾아보라고. 그들의 1세대 퍼포먼스도 꼭 찾아보라고 해줘. 당시 한국의 1세대 비보이들이 시작한 퍼포먼스가 세계적으로 센세이셔널했거든."
폭포에서 떨어지는 래프팅을 본 후, 다 같이 산에서 걸어 내려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헤어져야 할 때인데도 그 아빠가 근처에 한국 식당이 있는데 거기 맥주가 맛있다 등의 쓸데없는 말을 하며 아쉬워했다. 나도 내 연락처를 줄까 말까 고민을 하며 5분 정도를 더 이야기하다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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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하게 그들과 헤어지고 이틀이 지났는데도 그 가족의 잔상이 계속 남아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연락처를 안 준 것이 후회스러웠다. 무슨 일이야 이게.
이렇게 넘어가면 더 후회할 거 같은 마음에 아들의 이름으로 다양한 SNS채널을 찾아보았다. 없다. 그의 동네에 있는 힙합 그룹을 찾아 그의 아들이 있는지 확인. 없다. 이번 오클랜드 댄스 대회에서 5등을 했다고 했으니, 5등 팀 이름을 찾아봤는데. 역시 없네 ㅠㅠ
사실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포기가 안 돼요. 하여 마지막 방법으로 지난 15년간 들어가 보지도 않던 페이스북 앱을 다운 받아 아들의 이름과 그들이 사는 도시를 넣고 찾아봤다. 없어. 그럼 성만 넣고 사는 지역을 넣고 찾아봐야지. 결국 그의 엄마를 찾았습니다!!! 나의 집요함에 요하네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 마디를 했다.
"너 완전 스토커야. 너무 무서워! 그 엄마가 너의 친구요청을 보고 공포에 질릴 거 같은데?"
그렇다. 그녀의 페북은 친구가 아니면 컨택을 못하게 만들어 놨기에, 어쩔 수 없이 친구요청을 보냈음. 저 진짜로 이런 집요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지나간 인연에는 미련을 1도 두지 않는 인간인데 말입니다ㅠ
그녀는 요하네스 말처럼 이틀간 내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하여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진심을 담아 아주 긴 메시지를 보냈다.
너희랑 헤어지고 내 연락처를 안 준 것이 후회가 되어서 너를 찾게 됐어. Last name이랑 사는 지역을 조합하니 네가 나와서 다행이야. InKAS라는 단체에서 한국해외입양인들을 위해 진행하고 있는 무료 고국 여행 체험 프로그램을 알려주고 싶어. 아들이 성인이 될 때 꼭 신청을 해봐. 굉장히 좋은 프로그램이야.
내가 말했던 한국 B-boy 1세대 퍼포먼스 링크를 너희 아들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보내. 덧붙여 한국의 전통무술인 태권도를 가지고 예술로 승화시킨 퍼포먼스 링크도 같이 보낼게. 이 영상을 보면 내가 말한 한국인들의 예술적인 끼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을 거야. 나는 한국인들이 정말 Hip-Soul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그걸 너희 아들이 조금은 알고 있으면 좋겠다. 아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게. 한국에 오게 되면 나한테 꼭 연락해. 내가 서울을 보여줄게.
나의 진심 어린 메시지 덕분인지, 그녀는 친구요청을 수락한 후 바로 답변을 줬다.
"고마워! 한국에 가게 되면 꼭 연락할게"
위의 메시지는 정말 투명한 나의 진심이었다. 그냥 그가 우리의 정체성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길 바라는 진심. 이 마음이 조금이나마 그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보낸 링크를 안 본 분들이 계시다면 꼭 한번 보길 희망한다. 예술이 무엇인지, 창의성이 무엇인지, 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한민국 청년들의 품격 있는 퍼포먼스이다.
2006년 '익스프레션 크루'가 처음으로 선보였던 비보잉 퍼포먼스 "마리오네트"
https://youtu.be/xA1fv0GFn20?si=RkpvnADAq63kbk36
2011년 일본 예능프로에서 선보인 익스프레션 크루의 퍼포먼스
https://www.youtube.com/watch?v=W3GD6nJdGkQ
2019년 미국 The World Best 2019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던 국기원 태권도 시범단의 돌담 퍼포먼스
https://www.youtube.com/watch?v=WN5GEV-Ceyg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가 한국인 해외입양인 또는 한국에 관심이 있는 누군가를 어디선가 만났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한국을 설명할 것인가. 이것이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예술적인 끼'뿐 아니라 아주 당당하게 아래처럼 설명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나라이다. 그 어떠한 역경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신명과 해학의 나라이기도하며,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망설임 없이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이기도하다. 또 전진이 느릴지언정 후진은 하지 않는 나라이기도하며, 그 어떤 위기일지라도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 좋은 결과를 내는 전화위복의 나라이기도하다. 물론 사기 치기 딱 좋은 나라이기도하고, 여전히 전체주의 성향이 강해 아직도 갈 길이 멀고도 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전진하고 있는 나라이다. 아프리카보다 못 살던 최빈국에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후 현재는 문화 강국까지 된 무시할 수 없는 나라이기도하다.
나의 이 몽상에 가까운 한국인에 대한 자긍심이 때로는 부담스럽다고 말하던 요하네스였지만, 그가 한국에 처음으로 왔던 2010년과 또 다른 모습으로 놀랍게 성장한 지금의 한국을 보며, 이제 그는 외국 어디를 가던지 입이 닳도록 한국을 찬사 하는 코리아 전도사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입맛도 변하여 독일의 소시지보다 한국의 갈비탕을 더 좋아하게 되어버림 ㅎㅎ
대한민국에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믿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