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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캅'을 쓴 여인

'Conversation Club에서 만난 인연'

by 한나Kim

여행을 다니며 히잡이나 차도르를 쓴 여인은 많이 봤기에 굉장히 익숙하다. 그러나 아무리 자주 보아도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이 있으니, 바로 눈만 빼고 얼굴 모두를 가린 '니캅'을 쓴 여인들이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왕왕 볼 수 있다. 그런데 볼 때마다 너무 낯설어. 절대 익숙해지지가 않아... 살짝 무섭기도 하고, 약간 신비롭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물론 이 모두가 나의 편견에서 비롯된 감정이지만 말이다.

'니캅' 출처: 네이버

그녀들의 삶이 궁금했다. 니캅을 벗은 모습은 어떨까? 나랑 똑같은 사람일까? 여자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아서 조금은 소심하지 않을까? 등의 궁금증이 늘 있었다. 특히 이곳에 온 후, 어딜 가나 보이는 그들을 보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


4월 말부터 참석했던 Conversation Club에 꾸준히 나가고 있다. 그곳에서 독일인이랑 일본인이랑 친해져서 셋이서 하이킹도 다녀왔고, 한국 음식점도 갔고, 커피숍도 가면서 그간 매우 즐겁게 지냈다. 아쉽게도 독일인 사비나는 10일 전에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그 클럽에서 이번 주에 있었던 일이다. '아이들 방학 + 이런저런 일'로 약 3주간 참석을 못하다가 아주 오랜만에 모임을 방문했더니 처음 본 낯선 얼굴이 있었다. 차도르를 쓰고 있는 약 5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원래 매주 참석하던 멤버였으나, 지난 두 달간 고향인 방글라데시를 다녀왔기에 오랜만에 참석을 했다고 한다.

'차도르' 출처: 네이버

그날은 참여인원이 많지 않아, 오손도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다. 일본 친구가 그녀에게 방글라데시 방문은 어땠냐고 물어보자, 쾌활했던 그녀가 갑자기 눈가가 촉촉해지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향에 가면서 탔던 싱가포르 항공. 거기에 있던 남자 승무원이 너무 잘생겼었어. 아직도 생각나. 엄청 좋은 피부에, 큰 키, 낙타같이 길었던 속눈썹, 빛나는 미소와 목소리.. 나랑 딸이랑 그 남자 보느라고 비행기에서 한 잠도 못 잤잖아. 아직도 기억나. 너무 잘생겼어. 계속 생각나. 또 보고 싶어."


"ㅇ_ㅇ...??.. 방글라데시는 어땠는데?"


"아 방글라데시? 너무 힘들었어. 딸이랑 사위, 그리고 사위 부모님이랑 다 같이 한 집에 있었거든. 매일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느라 진짜 힘들었어. 좋은 기억이 없어. 아.. 그 싱가포르항공 승무원이 너무 잘 잘생겼었어. 계속 생각나"


차도르를 쓴 50대 여인이 세상 진지한 얼굴로 잘생긴 남자 승무원 이야기를 하는 게 왜 이리 웃기던지. 예상치 못한 이야기 전개에 배꼽을 잡고 한참을 웃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와.. 이분 쫌 매력 있는데?'


신나게 대화도 하고, 서로 깔깔 거리며 게임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차도르 여인을 부른다. 바로 그녀의 딸. 3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이랑 함께 들어왔다. 딸은 수업을 하고 있건 말건 엄마랑 이야기하고 나간다. 그러다 또 들어오고, 또 나가고.


결국 센터 대표가 이럴 거면 같이 하자고 그녀를 잡는다. "Me? No Way!(절대 싫어)"라고 당차게 외치며 다시 나가는 그녀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다. 축구공 좀 차 본 느낌이다. 터벌레 터벌레 위풍당당. 차도르를 쓴 딸의 왈가닥 모습을 몇 번 보니 그녀에게도 빠져든다.


'너무나 매력 있어. 꾸밈이 하나도 없어. 너무 투명해. 인간미가 넘쳐흘러!! 내가 딱 좋아하는 인간 군상이야!!!' 두 모녀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되며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당당하게 오갔던 딸이, 수업이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아들과 함께 들어오며 테이블에 와서 앉는다. 그 후 역시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



"다음 주 목요일이 내 딸 생일이야. 너희들 다 우리 집에 초대할게. 이 센터에서 걸어서 8분이고, 차 타면 1분밖에 안 걸려. 다들 우리 집에 와!"


ㅇ_ㅇ 네? 오늘 처음 봤는데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그녀에게 물어봤다. "생일파티에 100명 정도 초대할 거니? 대체 몇 명을 초대하려고..?" 그녀가 깔깔 웃으며 대답한다.


"다 같이 축하하면 좋지. 우리 집은 방 2개짜리 작은 집인데 나랑 남편, 우리 친정 부모님, 아들 딸 이렇게 6명이서 살고 있거든. 집은 작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 내 딸의 6번째 생일에 다 놀러 와!"


그녀가 너무 씩씩하고 대차게 이야기를 해서.. 왠지 가야 될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오늘 처음 봐서 그녀들 이름도 모르는데.. 그리고 본인도 아닌 6살 딸아이 생일에 가도 될까 싶기도 하고..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당황스러움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차도르 두 모녀 덕분에 유쾌한 대화를 마치고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유머러스한 50대 그녀가 갑자기 니캅을 쓰고 방을 나서는 것이 아닌가!


What??ㅇ_ㅇ


...


니캅에 대한 나만의 편견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린 순간이었다. 편견이란 것이 이렇게 가벼운 것이었구나. 이렇게 의미 없는 것이었구나. 나는 지금까지 그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인가. 부족했던 것은 그들의 겉모습이 아닌, 그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나만의 편견이었다는 걸 일순간에 깨달았다.


나의 편협했던 기준을, 나 스스로를 옥죄던 편견을, 단 한방으로 시원하게 날려준 매력적인 모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다음 주에 그들의 6살 딸에게 청포도 사탕이랑 한국 과자를 선물해 줘야지. 그녀들과 함께 하는 클럽 활동이 점점 더 기대된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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