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벽의 끝, 결혼 (8)
'차가웠던 싱가포르. 그곳에서의 재회.'
2007년 말, 19개월 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9개월이란 기간 동안 나는 나다움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한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등을 온몸으로 느끼고, 배우며, 경험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에서의 경험 덕분에, 그간 나보다는 남의 행복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면서 살았던 나는, 인생의 주체는 남이 아닌 '나 자신'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인생의 특별함 그리고 또 별거 없음을 동시에 느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무작정 해외에서 일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외국에서 홀연단신으로 일하면서 살다 보면, 이 세상은 생각보다 우리와 다르지 않고, 세상에는 생각보다 심각하게 나쁜 일이 없음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덧붙여서 가족이며 친구가 전혀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정해야 할 때, 남들의 눈을 의식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얼마나 나를 특별하게 하는지, 또 행복하게 하는지 모른다. '오로지 내가 정할 수 있는 삶.'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나는 이때 느꼈다. 물론 배낭여행 중에도 느끼지만, 사실 여행은 정해진 짧은 시간 안에 낯선 장소에서의 자유이기 때문에 해외 근무지에서의 자유와는 결이 다르다. * 해외에서 근무하며 느끼고 배웠던 부분은 이 글을 끝내고, 다른 매거진에서 써보고자 한다.
어쨌든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그리고 로버트를 만나게 해 준 미국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바로 취직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한번 더 방랑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나는 싱가포르에서 한번 더 취업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왜 하필 싱가포르였냐 하면, 아시아에서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의 삶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싱가포르는 참으로 특이한 나라다. 서울만한 나라, 비자를 받기가 너무나 쉬운 나라, 전 세계 다국적 기업의 아시아 본사가 있는 나라, 여러 인종과 종교가 섞여서 사는 나라, 영어가 공용어인 나라, 완벽한 인공미가 있는 나라, 쇼핑센터가 즐비한 나라, 1년 이상만 일하면 세금이 면제되는 나라.. 등등. (참고로 이는 2008년 기준이다. 요즘은 싱가포르도 많이 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단 다국적 기업이 많기에 구직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고, 영어를 공용어로 쓰니 이 역시 나에게 유리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일본어 구사에 전혀 무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본어를 전공했다 일본 기업이 많은 싱가포르에서는 꽤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가서 6개월 간 도전해보고, 안되면 돌아오자.'와 같은 배포가 나에게는 있었다.
싱가포르는, 직업을 구하고자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그래서 헤드헌팅 회사가 아주 많다. 이를 알고 있던 나는, 나름 가장 잘 나가는 일본계 헤드헌팅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직업을 구해보고자 했다. 구직을 위해 헤드헌터들과 면접을 보러 간 그날, 나는 그곳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뭐, 어차피 1년, 길어야 1년 반 정도만 일할 생각이었으니 괜찮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해서 그냥 헤드헌터로 일을 해보기로 했다.
싱가포르는 나에게 너무나 차가운 곳이었다. 일단 자연을 좋아하는 나에게 그곳의 인공미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았다. 싱가포르는 심지어 나무 사이의 간격도 정확히 자로 잰 듯하다. 물욕이 없는 나에게 곳곳에 위치한 쇼핑센터는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았으며, 늘 친절했던 싱가포르 동료들도 마음을 드러내는 그런 솔직한 관계까지는 가지 못했다. 같은 팀에서 일했던 한국 언니와 일본 언니와는 그래도 늘 같이 붙어다녔기에 그나마 위안이 됐던 것 같다. 싱가포르에서의 하우스메이트는 중국계 말레이시안 친구였는데, 잘 나가는 회계사였기에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그저 내가 사는 곳 근처의 인공미가 넘치는 바닷가에서 걷는 것이 유일한 루틴이었다.
솔직히 많이 외로웠다. 그냥 특별할 것 없이 일하면서 돈을 버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기에. 오늘이 내일이었고, 내일이 오늘 같았던 하루하루였다. 그래서 그런가. 그때는 내가 한없이 부족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더랬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는 영원히 혼자겠지. 나한테 남자는 없을 거야. 결혼도 당연히 못할 거고.' 등과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20대 후반의 여자라면 누구나 그런 모호함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나 싶다. 그냥 모든 것이 다 후회스러웠고, 나 자신이 작아지는 날들이었다. 그리고 나의 행동을 후회한다 해도 변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더 절망스러웠던 것 같다.
그때였다.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던 그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이메일이 왔다. 로버트였다.
"나 인도네시아에 출장을 갈 일이 생겼는데, 너를 꼭 다시 보고 싶어. 인도네시아에 가기 전에 한국을 들릴게. 잠깐 볼 수 있을까?"
아니, 아시아가 무슨 유럽 대륙인 줄 아나. 지도는 보고 말하는 건지. 한국이랑 인도네시아는 비행기로 7시간이 걸리는데 -_-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그의 이메일이 진심으로 반가웠다. 그가 나를 보기 위해 미국으로 온다는 것을 거절한 후부터, 거의 1년 반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반가웠던 것 같다.
나는 바로 답메일을 보냈다.
"나 지금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있어."
...
신기하게도 내가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그가 다시 나타났다. 멕시코에서의 만남 후 딱 2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