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너에게서 향기가 난다.'
그는 내 마음이 가장 힘들고 지쳤을 때,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많이 외롭고 지쳤던 그때, 그가 보낸 뜬금없는 메일은 나에게 즐거운 빛이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있다는 나의 메일에 그로부터 즉각 답변이 왔다.
"나 싱가포르를 통해 인도네시아로 가는 티켓을 샀어. 싱가포르에서 2박 후 인도네시아에 갔다가, 일주일 후 다시 싱가포르에 와서 3일을 더 있을 거야. 도착 날짜랑 시간은 이거야. 공항에 꼭 나와주면 좋겠다."
나는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 마냥, 잔뜩 고조된 기분으로 창이 국제공항에 그를 만나러 갔다. 솔직히 멕시코에서의 만남은 꽤 지난 일이라 그때의 추억은 이미 아스라이 바래져 있었고, 지난 1년 반 동안 거의 연락을 안 했기에, 그에 대한 기대감이 하나도 없었다. 또한 멕시코에서 느꼈던 그에 대한 호감은 그 사람 자체보다는 그곳의 로맨틱한 분위기에 취해서 그랬으리~라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공항에서 그를 기다릴 때 설렘보다는 오래된 반가운 친구를 다시 만난다는 기대감이 강했다.
창이 공항은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입국 심사장 구역에서 짐을 찾는 모습을 밖에서 볼 수가 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저기서 멀대 같은 로버트가 보였다. 그가 보자마자 나한테 다가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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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멕시코에서 그에게 느꼈던 호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순간 깨달았다. 얘는 진짜 좋은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슬며시 그렇지만 뜨겁게 올라왔다. 그리고 오하까에서 멕시코시티로 올라오는 야간 버스에서, 유리드와 그 남자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면서 둘이 나누던 대화 장면이 순간. 떠올랐다.
"쟤네들은 왜 결혼을 안 해? 나는 결혼할 거야. 나는 결혼해서 아프리카는 미래의 남편이랑 갈래."
-> 방락 벽의 끝, 결혼 (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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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이 장면의 왜 떠오르지? 이거 뭐지 싶으면서 좀 혼란스러웠다. '왜 이래? 뭐야 이거.. 나 정말 쟤랑 결혼하는 건 아니겠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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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그 로버트랑 결혼해서 쌍둥이를 키우며, 10년째 서울 하늘 아래서 살고 있다. 누군가가 행복하니?라고 묻는다면, 음.. 우리는 아직도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싸우며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싸울 때는 '저놈 쉐끼. 저 차가운 독일 놈의 시키, 피 한방을 안 날 놈!'이라고 날뛰고, 사랑할 때는 '우리 남푠, 세상에서 제일 멋진 그대~ 최고!'라는 감정을 뿜뿜 날리는, 그런 지극히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는 중이다. 사실 친구들은 나의 역동적인 감정이 평범하지 않다고들 한다.
이 글을 3회 정도 쓰는 중에 그에게 걸렸다.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는,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하는 나의 성격을 걱정하며 글 쓰는 것을 중단하라고 요청을 했더랬다. 그러나 황소보다 더 센 고집을 가진 나에게 어림도 없지. 그렇지만 그의 근심이 무엇인지도 잘 알기에 이 글은 우리가 결혼하는 날까지만 쓰기로 합의를 봤다.
사실 진정한 삶은 결혼 이후에 시작되는 것인데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신데렐라가 과연 왕자님과 끝까지 행복하게 살았을까. 세상의 모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화가 정말 해피엔딩일까? 사실 인생에서 해피엔딩은 없을 것이다. 새드엔딩이라도 끝까지 새드일 수 없듯이 말이다.
함께 살면서 다사다난한 사건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결혼한 지 10년이 흘렀다. 충무로 한국의 집에서 전통혼례로 결혼을 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는지. 세상을 떠돌며 내 마음대로 살던 20대의 내가 어느덧 40대가 되었는지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언젠가 내가 죽는 순간이 오겠지. 그때 지나온 나의 찰나 같은 인생을 후회하지 않도록, 진실된 마음으로 낭비하지 말면서 즐겁게 살아야겠다고 오늘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