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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Kim Oct 01. 2021

방랑 벽의 끝, 결혼 (10)

'영혼의 동반자는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임을..'

로버트가 짐을 챙겨 입국 심사장에서 밖으로 나왔다.


2년 전의 모습과 전혀 변함없는, 밝고 온화한 그의 분위기에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는 로버트의 숙소로 가서 먼저 짐을 풀고, 싱가포르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어디를 갔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딱 한 곳. 리틀 인디아에 갔던 것만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몸이 녹아내릴 듯 더웠던 날이었다. 그 일대를 걷는 것만으로도 땀이 쏟아졌던 것 같고, 너무 뜨거운 더위로 아스팔트 위가 이글거리는 듯 보였더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를 생각하면 힘든 느낌이 하나도 없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지금 보면, 얼굴이 소녀 같고 또 투명하다고 해야 하나? 꾸밈이 전혀 없는 모습이지만 그냥 풍기는 모습 자체만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내가 보인다. 서로를 향한 '호감'이라는 약은 진정 마법 약인 듯하다.


싱가포르의 리틀 인디아는 매력적인 곳이다. 싱가포르 고유의 느낌이 전혀 없는, 정말 인도에 있는 듯한 느낌이 가득 나는 곳. 그곳에 위치한 힌두사원도 그곳만의 매력을 더한다. 상점 곳곳에서 파는 인도풍 옷과 액세서리도 아름다웠고, 곳곳에 즐비했던 인도 음식점, 그리고 어딜 가나 느껴지던 인도의 향식료 냄새까지.. 존재 자체로 매력적인 곳이다.


싱가포르에서 함께 지냈던 며칠 동안에도 역시나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오랜 친구 같은, 또는 이미 안지 몇십 년이 된 듯한 그런 편안함이 있었다.


나는 사실 스몰토크는 잘 못하는 사람이다. 날씨가 어쩌고, 영화가 어쩌고, 그런 표면적인 대화에 참 약하다. 그래서인지 기가 맞는 사람과는 이런저런 깊은 얘기를 하면서 친해지지만, 기가 맞지 않는 사람이랑은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나 스스로를 망가뜨리며 아무 말이나 막 던지고 만다. 그러다 그런 내 모습에 지쳐 그와 거리를 두곤 했다.


나는 인생에 대해 논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20대였던 그때도 그랬다. 얼마나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인가. 지금이야 주위 사람들 모두 연륜이 생겨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다만, 마냥 즐겁고 재미있기만 했던 20대 초반부터 그랬으니..-_- 그래서인가, 20대가 되어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나의 본심을 드러내는 말은 좀처럼 하지 않게 됐던 것 같다. 친한 베프들이야 나의 이런 모습을 알고 있으니, 별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했지만, 뭐. 그들과도 역시나 싸해지는 순간이 종종 있기는 했다.


눈치를 보는 우리 사회에 나는 한껏 길들여져 갔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할 말이 없으면 그저 잘 들으며 맞장구를 쳐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과연 어떤 모습이 나의 진짜 모습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밖에서 보이는 내 모습과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의 괴리로 혼란스러웠던 날들이었다.


그런 나에게 거침없이 나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나의 꿈이 무엇인지, 인생이란 무엇인지, 나의 생각은 어떤지. 정말 숨김없이 말할 수 있는 상대. 그가 바로 로버트였다. 희한하게 그에게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부끄럽지 않았다.


Soulmate라는 말이 있다. 영혼의 동반자. 솔직히 이전에는 소울메이트는 언어로 결정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왜냐하면 소울메이트는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어야 하니까. 당연히 모국어로 얘기해야 잘 통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으므로. 그런 내가 로버트를 만나고 '영혼의 동반자는 인연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지, 언어로 맺어지는 사이가 아님'을 알게 됐다.


...


짧은 3박 4일 동안 로버트와 싱가포르 곳곳을 누볐다. 클락키도 가고, 센토사 섬도 가고, 내가 살고 있던 Pasir Ris도 갔다. 그러다 그가 귀국을 해야 하는 날이 왔다. 만남이 있으면 늘 이별이 있는 법이니까. 이번에도 역시 담담하게 헤어져야지 싶다가도, 좋은 인연이랑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솔직히 많이 아쉬웠다. 그렇다고 뭘 시작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게다가 나는 철벽녀인걸. 나의 마음을 티도 못 내는 소심쟁이... 아쉽다고 해도 변할 수 있는 건 나에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 짧고 굵은 만남을 남긴 채 나를 떠났다. 슬프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또 다른 무용담이 생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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