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 있고,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
시누이가 독일에서 아들 에릭과 파울, 그리고 그녀의 절친 클라우디와 함께 크라이스트처치를 방문했기에 지난 2주간 다 같이 남섬을 여행했다. 만족스러운 여행을 마친 후, 그들은 딱 이틀 전 일요일에 독일로 돌아갔다.
여행할 때 읽을 책을 준비는 했다. 그러나 바쁜 일정과 스마트폰 중독(?)으로 책 읽기는 늘 뒤로 밀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행 막바지에 핸드폰 스크린이 박살 나는 바람에 3일간 강제로 폰을 종료한 채 가져갔던 '어둠 뚫기'를 읽을 수 있었다.
핸드폰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건만, 왜 이리 집착을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폰이 없던 3일 간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다시 핸드폰의 노예가 되어 있다.
...
'어둠 뚫기'는 게이 작가가 쓴 소설이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에세이에 가깝다. 이 책에는 엄마와의 어긋난 관계 그러면서도 그녀를 향한 사랑, 그의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죄책감 등,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솔직하고 투명한 전개되어 있다. 인간으로서 그가 느낀 고뇌와 감정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그가 던진 의문들에 대해서도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는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 자체는 담백한 어조로 전개된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어둠과 슬픔이 빽빽이 도사려 있다. 엄마를 향한 사랑과 미움, 이쪽과 저쪽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질감 속의 공허, 폭발하는 성욕을 참지 못하고 일회성 상대를 찾아 섹스를 해야 하는 죄책감, 반면 일회성 만남에서 느껴지는 해방감과 자유. 이 책은 한 인간의 솔직한 서사가 얼마나 진실되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뭐든지 멋대로 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다. 이는 인간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삶의 고뇌가 아닐까. 나와 다른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엄마라 할지라도 말이다.
P13-14
애초에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긴 할까. 나는 나조차 제대로 이해해 본 적이 없는데. 그렇지만 엄마는 나를 낳아준 사람이 아닌가. 나는 엄마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래서 나와 엄마 둘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엄마를 이해해보고 싶었다.
P27
책상 앞에 앉아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엄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엄마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엄마의 인생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은 하나, 엄마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P72
생각해 보면 그동안 엄마의 삶이란ㅡ타지에서 홀몸으로 두 아들을 기르는, 고등학교 중퇴 학력을 지닌 가난한 여성의 삶이란ㅡ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하루는 무슨 대화를 나누던 중 엄마가 지나는 말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결혼하고 애 낳고 마흔 가까이 될 때까지, 그러니까 두 아들놈이 제 앞가림을 어느 정도 하게 될 때까지 자신이 뭘 어쩌고 살았는지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고 말이다.
P73-74
양육 과정에서 두 아들을 정서적으로 방임하다시피ㅡ가끔은 박해하다시피ㅡ해온 것이 전부 엄마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래, 나도 알지. 아마 형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엄마를 용서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우리 안의 상처들이 오롯이 엄마의 잘못으로 생긴 게 아님을 알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었지만, 그래서 엄마를 안쓰럽게 여기는 순간들도 더러 있지만, 그럼에도 엄마를 용서할 수는 없는 것. 어떤 원망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을 분석하거나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는 있어도 결코 해소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엄마를 사랑한다. 그리고 서른일곱 살이 되자,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엄마를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듯이 말이다.
P177
만약에 나의 수명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면, 그런 게 가능하다면, 나는 여생의 절반쯤을 한 알의 캡슐로 응축하고 싶다. 그걸 영양제 통에 슬쩍 넣어두고 아침에 엄마가 꺼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내 삶이 엄마의 삶이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나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
P190-191
나는 이제 엄마와 겨루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엄마의 말에서 오류나 비약을 조목조목 짚어낸 뒤 내가 옳다고 믿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해서 엄마를 변화시킬 수 없으리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번번이 그것을 시도했다. 맞서다 보면, 부딪치다 보면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달라질 줄 알았으니까. 더디게나마, 아주 약간이나마 우리가 포개질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그러나 엄마는 달라지지 않았다. 변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대로였다. ... 그러므로 나는 있는 그대로의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했다. 이제부터라도 그래야 했다. 서른일곱 살이 되어서야 나는 마침내 그 연습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사실이 너무도 한심하여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P220-221
언젠가는 정말 혼자서 아침을 맞이하게 되리라. 엄마 없이 살아가게 되리라. 그런 날은 올 것이다. 모든 것은 종료되니까. 마지막에 이르고, 기어이 끝나고야 마니까.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날에 대해 생각해 왔다.
평생 그날에 대해 생각해 왔다.
끝.
놀라운 사실은 끝을 가늠하다 보면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희미하게나마 어떤 가능성들이 눈에 보일 듯하고,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 걸음, 적어도 한 걸음은 더 옮길 수 있다. 속는 셈 치고 하루만, 오늘 하루만 더, 하면서.
그렇게 살다 보면 진정한 끝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곳에도 엄마가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관해 많은 고민을 했고, 지금은 받아들였으나 여전히 깊은 자괴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흑과 백만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그의 존재는 너무나 연약하다. 단지 그의 성정체성 때문에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 셈이다.
P43
내가 생물학적으로 남자이긴 하지, 그렇긴 한데, 나는 정말이지 내가 그들과 같은 종속이라 느낀 적이 살면서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 남직원들 역시 나를 한 차례 겪어본 것만으로 내가 그들과 같은 남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챘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두 번 다시 그 술자리에 불려 가지 못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여직원들에게는 좆 달린 사내새끼였을 뿐이므로 나는 이쪽 편도 될 수 없었고, 저쪽 편도 될 수 없었다. 온전히 남자가 될 수도 없었고 당연히 여자가 될 수도 없었지.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고, 늘 그러한 상태로 살아왔으며, 살게 될 것이었다. 앞으로도 쭉.
P46
고백하자면 나는 대학교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남자고등학교에 다닐 적에도, 남자중학교에 다닐 적에도 유사한 일을 겪었다.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남자들에게 위협받고 남자들에게 멸시당한 기억. 한 번은 일방적으로 심하게 얻어맞기도 했지. 그럼에도, 어쩌면 그래서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들 중 몇 명과 섹스하기도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제 와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당시에 나는 나에게 벌을 주듯이 그들과 섹스했던 것 같다.
섹스가 그들에게도 벌이 되기를 바랐다.
P93
나는 예술대학원에 진학하여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동성애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침내 그런 내용이 담긴 책을 출간할 수 있었고, 심지어 그걸 지인들에게 사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내 안에 새겨진 수치심을 완전히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P94
나는 지나치리만큼 꾸준하게, 가끔은 누구보다 야멸찬 방식으로 스스로를 미워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 의지나 노력과 무관한 일이었으니까.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항상 내 잘못이었다.
내 죄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내 죄였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으나 늘 내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신하건대 나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도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멈출 수 없이 성충동이 올라오면 1회성 만남을 찾아 섹스를 한다고도 고백한다.
P140
맨 처음 번개를 하고 귀가하는 길에는 조금 울었다. 슬퍼서 운 것은 아니고 아파서, 어디 잘못되는 건 아닐까 좀 무서워서, 나는 왜 이러고 살까 한심해서 훌쩍거렸다.
천벌을 받을지도 몰라.
그날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향했다. 칫솔에 치약을 듬뿍 묻혀서 혓바닥까지 박박 닦았다. 샤워 타월에 거품을 잔뜩 일으켜 온몸을 구 석구석 문질렀고,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열 번까지는 그런 식으로 자책 비슷한 걸 했는데, 이후로는 점차 무심해졌다. 딱히 그럴만한 일도 아니지 싶었으니까. 천벌을 이미 받을 만큼 받지 않았나? 어차피 동성애자는 지옥행이라는데 여기서 더 타락하든 덜 타락하든 무슨 차이가 있지?
P143
번개를 마치고 집까지 털레털레 걸어오는 길에 혼자 생각하곤 했다. 인류가 만들어내야 하는 발명품 중에는 성욕을 제거하는 약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 약을 먹고 내 안의 성충동을 깨끗이 소거해 버릴 수 있다면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리라 여겼다.
그리고 그는 1회성 만남을 가질 때 그의 안에서 더없는 자유를 느낀다고 표현했다.
P149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내가 번개를 했던 이유는 그 과정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함도 있었다. 일생에 걸쳐 오늘 단 하루, 한두 시간 외에 다시는 만나지 않을 이와 섹스하는 것.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나로부터ㅡ어쩌면 현재의 나에게서도ㅡ뚝 떨어져 나오는 듯한 감각을 선사했다. 나는 낯선 장소에서 이름 모를 남자와 알몸으로 뒹구는 동안에 내가 살던 세계로부터 홀연히 해방될 수 있었다. 엄마가 아는 나, 지인들이 아는 나, 회사 동료들이 아는 나, 작가로서의 나는 물론이고 내가 아는 나로부터도 유리되어 일종의 비체가 될 수 있었다. 비체이자 순수한 주체가 됐다. 여기서 순수함은 나를 규정하거나 옭아매는 타의 혹은 자의조차 전무한 진공상태를 의미한다. 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 아무도 거닐지 않은 눈길로의 진입이랄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사회통념상 지극히 부정하고, 타락한 짓을 벌이는 동안에만 생애 근원적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니. 나는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날 남자들 앞에서만 나 자신을 새로이 창조해 낼 수 있었다. 나조차 몰랐던 나의 욕구, 한계, 가능성, 용기, 속물성, 페티시, 저열함, 두려움, 너그러움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글쓰기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나는 백지에 나를 한 줄씩 써 내려가면서, 눈 위에 발자국을 꾹꾹 눌러 남기면서 내가 아닌 나를 향해 다가갈 수 있었다. 나를 잃어버리면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가 일회성 만남을 통해 느끼는 자유로움이 내가 여행 중에 스쳐 지나가는 ‘짧은 인연들’에게 느끼는 감정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인연들이기에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줄 수 있고, 그렇게 나의 원초적 순수함을 표출하면서 발산되는 희열과 해방감, 다시 말해 이 진실된 행복감이 그가 1회성 만남에서 느꼈던 자유로움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ㅡ다시 말해 성정체성이 같거나 다른 모든 이는, 나의 참 자아를 온전히 표현할 때 비로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원초적인 인간인 것이다.
...
이 책에 대해, 그리고 작가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오히려 지금은 깊은 침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름을 인정하는 일은 설득이 아닌,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선우 작가님의 글이 많은 이들에게 그런 간접적인 경험의 기회를 선물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의 글을 통해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이 세운 틀에서 잠시 벗어나 옆을 바라볼 수 있기를, 또한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더라도,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며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누군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기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