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철, '파피루스의 비밀'

by 한나Kim

뭔가 스릴 있고 재미있는 소설책이 읽고 싶었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이야기. 어떤 책을 읽을까 세심히 바라보다 광활한 사막 위로 슬며시 보이는 피라미드로 구성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 뒤를 살펴보니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를 배경으로 광대한 시공에서 펼쳐지는 스펙터클 스토리'라고 적혀 있었다. 덧붙여 '이집트 신화의 비밀을 파헤쳐 참 나를 찾는 구도 소설'이라고도 적혀 있다. 그래 이거다 싶어서 냉큼 빌려왔다.


기대를 하면서 읽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책은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게다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얕지만 방대한 지식이 끊임없이 들어있었다. 책의 내용 또한 기승전결이 아닌, 기승승승결이다. 때문에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과연 이 책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보겠다.


일단 이 책에는 초반에 몇몇의 주변 인물이 나오는데, 그 모든 인물들의 서사가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읽으면서 이 인물들이 나중에 어떻게 이집트와 연결이 될까 싶어 신경 써서 읽었는데, 책의 마지막까지 그들의 활약이 전혀 없었다.


P24

박호순을 거꾸로 읽으면 순호박이 된다. 그래서 순호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놀림을 받았다. 그러나 이름과는 판이하게 전교생 가운데 가장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옷도 하얀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 캐시미어 스웨터 등 최고급품으로 입었고 운동화 대신에 가죽 구두를 신었다. ... "순호박!" 여느 여자아이라면 남학생이 이렇게 놀리면 울상을 짓게 마련인데 박호순은 자신이 순호박이 아니라고 확신하기 때문인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 이렇게 시작된 박호순의 이야기는 더 상세한 묘사로 4장이나 이어진다. 나중에는 순호박 정물화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 이야기가 대체 이집트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면서 신경 써서 읽었다...

P33

초등학교 급우 가운데 학업성적에서 나와 1,2등을 다투었던 P는 박호순 때문에 상사병이 걸린 녀석이었다. 어느 날 P와 함께 박호순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야깃거리로 삼은 적이 있다. P는 우리 이웃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영화관 3개, 제과점 4개를 가진 부자여서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는 물론 불어 과외까지 받았다. ... -> 이렇게 시작된 P의 이야기는 장장 5장 반이나 이어진다. 그는 나중에 투우사 복장을 하고 <빤스 박사의 노래 스페인어>라는 강좌를 가르친단다..



덧붙여 책의 주인공인 임호택은 매 장마다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 나중에는 수많은 정보로 인해 책을 읽다가, 도대체 내가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소설인가, 사전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P29

그 무렵에 나는 우리 집에 두어 달 머무신 할아버지에게서 한자를 배웠는데 색깔을 나타내는 글자에 유난히 관심이 갔다. 청, 홍, 황, 백, 흑... 친구 가운데 황씨 성을 가진 아이의 얼굴이 누런지, 백씨 친구는 하얀지 살피기도 했다. 기대와는 달리 황씨, 백씨 아이의 얼굴색은 제각각이었다. 황여숙이라는 여학생은 피부가 백옥처럼 하얗게 빛난 반면, 백종철이라는 친구는 부황 걸린 것처럼 얼굴빛이 누렇게 떴다.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태어난 해에 따라 이렇게 동물이 설정되는 '띠'가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내 딴엔 이를 검증하느라 그즈음에 열린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육상 100미터 달리기 금메달리스트의 띠를 확인했다...


P147

노인의 말을 듣고 나는 피그말리온 효과, 로젠탈 효과, 플라시보 효과 등을 연상했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주변에서 마음에 드는 배필을 찾지 못해 자신의 이상형 여성을 조각으로 만들었다. 돌덩이 여자를 바라보며 애틋한 연정을 품었다. 그 정성에 감동한 아프로디테 여신은 조각품에다 생명을 넣어주었다.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로젠탈 효과도 마찬가지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로젠탈 교수는 어느 초등학교에서 지능검사를 한 후 점수와 관계없이 무작위로 20% 명단을 골랐다. 그 명단을 교사에게 주면서 "머리가 좋은 어린이들이니 잘 가르치면 성적이 좋아질 것"이라 말했다. 몇 개월 후에 점검했더니 그 명단에 든 학생들은 지능검사 점수, 성적이 크게 향상됐다. 플라시보 효과는...


P149

나의 관견으로는 <주역>은 자연현상을 64괘, 즉 64가지 경우의 수로 분류 설명한 책일 뿐이다. 수천 년 전 당대 최고의 석학, 현자들이 정리했으니 통찰력이 그득하긴 하지만 이것으로 오늘날 복잡한 세상을 해명하기엔 미흡하다. <주역>의 가치를 높이려 자꾸 신비주의 덧칠을 하면 <정감록> 같은 도참으로 전락할 뿐이다.



...


그렇다면 이 책의 내용은 무엇일까. 내가 나름대로 요약한 내용을 적을 터이니 읽어보도록 하자. 이 요약본도 잠깐 딴생각을 하면 길을 잃을 수 있으니 최대한 집중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고대 상형문자 해독을 취미로 가진 한국인 천재 건축가 임호택이다. 그는 제르바 관광국에서 골프장을 포함한 복합 리조트 타운을 설계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제르바에 도착했다. 그가 제르바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리비아에서도 그를 초청한다. 임호택은 제르바에서 리비아로 가기 위해 요트를 대여하고 몸을 맡기는데, 세상에나 요트의 선장이 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시퍼런 칼을 들이대며 강도로 돌변해 그를 해치려고 한다. 그는 기합소리와 함께 태권도 손칼 동작으로 선원의 팔목을 내리치며 몸을 잽싸게 날려 바다로 뛰어들며 탈출한다. 그리고 그는 바닷속에서 기절한다.


그가 깨어난 곳은 어느 바닷가였다. 운 좋게도 그는 동굴 속에 사는 현자의 집에서 신세를 지며 강도에게 칼을 맞아 망가진 몸을 회복한다. 회복만 하는 것이 아니고 현자의 아내와 밤마다 뜨거운 밤을 보낸다.. 그게 그들의 문화라고 한다. 현자는 그에게 호흡법부터 온갖 비법을 알려준 후, 임호택에게 자신의 집안에서 대대로 가보로 내려오던 납작한 돌을 건네준다.


돌을 건네받은 임호택은 사막을 가로질러서 길을 가다가 들개 떼를 만나서 죽을 뻔한다. 역시나 운이 좋게도 그 순간, 사막을 오가는 대상들을 만나 구조된다. 그리고 대상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배를 소개해준다. 그는 배를 타고 이집트로 가는 도중, 갑자기 감시선에 나타나 그가 탄 배에 대포를 쏜다. 알고 보니 그 배가 마약 밀수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이집트 보안기관 국장으로 보이는 사내와 대치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국장이 임호택이 고대 상형문자를 잘 안다는 것을 안 후, 그를 비밀기지로 보내버린다....


눈을 가리고 도착한 그 비밀기지에서 임호택은 파피루스 자료들을 해독하라는 명을 받고 밤낮 할 거 없이 노예처럼 그것을 해독한다. 그곳에는 이미 파피루스를 해독하고 있던 '네페르티티'라는 아리따운 여인도 있었는데, 그 여인과 그녀의 어머니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게다가 네페르티티 여인은 알고 보니 미국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한 피아노 수재였다. 임호택은 그녀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행복해한다.


그들에게 파피루스를 해독하라고 시켰던 부자(父子)는 파피루스에 혹시나 나와있지 않을까 싶은 보물에 관심이 있었다. 임호택과 네페르티티 여인이 파피루스를 열심히 해석하고 있는 도중, 갑자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난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그들을 탈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임호택은 총을 맞는데, 운이 좋게도 그가 앞전에 현자에게서 받은 돌이 그를 지켜주어 그는 죽지 않는다...



이 책에는 스펙터클한 내용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있다. 읽으면서 이게 인가? 싶으면 다시 이 나온다. 그러다 아 이게 이구나 싶으면 또 다른 이 나온다...


자 그렇다면 위 내용이 이 책의 핵심일까? 아니다. 사실 이 책의 핵심은 파피루스의 해독본인 것이다. 그런데 해독본도 너무나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음...


P192

사랑하는 후손들아.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 세트 등 여러 신들의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리느냐? 먼 훗날 이 글을 읽는 후손이라면 너무도 엉터리 같은 야담이라고 웃겠지? 그러나 그날은 몇 천 년 후가 될 것이다. 당분간은 그대로 믿어라. 오시리스가 저승과 이승을 넘나 든다고 믿고, 이시스 여신이 남자 없이도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의심하지 말며, 호루스의 눈은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라. 너희가 믿는다기보다는 남들이 믿도록 하라.


P228

사랑하는 후손이여,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샜다. 양해하라. 저승세계란 허구를 만듦으로써 생기는 유용성을 조금 더 고찰하겠다. 이승이 종말이라면 대다수 장삼이사들은 현실 세계의 성실한 일상에서 일탈하리라. 강도, 강간, 폭력, 사기 등 범죄가 증가할 것이다. 범죄를 억제하는 요인으로는 현실에서의 처벌 가능성뿐만 아니라 저승에서의 심판 두려움도 꼽힌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현인들을 저승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고서도 현실의 질서를 위해 저승의 허구를 꾸며냈다.


...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방대한 내용을 쪼갠 후, 하나의 이야기로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 너무 복잡한 세상이라 그런지, 쉴틈이 없이 정보가 주어지는 이야기보다는 여백이 있는 책에 더 마음이 가기 때문이다.


시간이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읽고 감상평을 도전해 보길 바란다. 사실 다른 분이 쓴 감상평을 보면서 내가 과연 잘 쓴 것인지 알고 싶다. 내가 진짜 제대로 읽은 것이 맞나? 나도 궁금하다. 제가 읽은 내용이 틀릴 수 있으니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