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영어로 익히는 시스템 그리고 그 위대함.'
둥이가 태어난 이후로 내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아이들의 ‘행복지수’다. 나는 어릴 때 소소한 행복을 자주 느끼며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행복감 역시 하나의 습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그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해왔고, 지금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둥이가 어릴 때는 그들의 소소한 행복을 위해 무조건 놀이터로 나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놀이터에서 놀았고, 심지어 영하 10도 일 때도 쉬지 않고 놀았다. 둥이는 놀이터라는 작은 세상에서 친구를 사귀었고 규칙을 배웠으며 모험심을 길렀다. 이렇게 밤낮없이 뛰어노느라 아이들에게 한글은커녕 숫자와 알파벳을 가르칠 시간도 없었다. 책도 거의 못 읽어줬던 것 같다.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마냥 놀기만 하다가 코로나가 터진 2020년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코로나 여파로 얼레벌레 줌으로 수업을 하다 보니, 어느새 초1 여름방학이 되었다.
초등학교 방학은 유치원 때랑은 차원이 달랐다. 놀아도 놀아도 시간이 '너어무' 많아. 코로나로 어딘가 여행을 갈 수도 없었고, 놀이터에서 노는 것도 하루 8시간이면 충분했다. 이 남아도는 시간에 무엇을 할까 하다가, 이 기회에 영어를 해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수소문 후 괜찮은 필리핀 선생님을 소개받게 되었다.
영어수업을 해보자 아무리 마음을 먹었어도, ABC조차 모르는 둥이가 과연 줌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을까 하는 강한 의심이 들었다. 게다가 선생님이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할 텐데 과연 저 핏덩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사부작거리는 아이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인데! 이 둘이 화상으로 수업을 받는 게 가능할까 하는 불안함까지..
그렇게 걱정이 되었지만, 남는 시간을 마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기에 딱 3개월만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자는 마음으로 초1 8월에 화상영어를 시작했다. 비록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수업이었지만, 아이들이 중간에 울거나 하기 싫다고 징징대더라도 최소 3개월은 반드시 이어가겠다는 각오는 가지고 있었다.
첫 두 달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영어를 하나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하는 말을 하나하나 통역해줘야 하는 상황. "Repeat me" 하면 따라 하래. "Can you read it" 읽어보래. "What is this" 이게 뭐냐네.
그때의 나는 화면이 안 비추는 곳에 앉아 감정과 영혼을 뺀 채 그들에게 속삭여주는 투명인간이었고, 아이들이 눈물이 나올 거 같으면 앞으로 가서 토닥여주는 관리인이었으며, 집중력을 잃어 딴짓을 할 때 정신 차리게 만드는 선생님이기도 했다. 1인 3역을 하다 보니 30분이 마치 3시간처럼 느껴지던 두 달이었다ㅠ
다행히도 두 달이 지나자 아이들이 조금씩 나의 도움 없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매번 비슷하게 반복되는 패턴이기에 사실 어려울 건 없었다. 세 달이 되자 처음 듣는 문장이 나올 때도 눈치껏 스스로 수업에 임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네 달째가 되자 비로소 "화상영어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둥이는 첫 달에 알파벳과 파닉스를 배웠다. A 하면서 Apple, B 하면서 Bear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때 파닉스를 한국어로 배웠다면 'Apple=사과'로 배웠겠지만, 둥이는 영어로 배웠기에 'Apple=사과그림'으로 배웠다.
다른 예를 들면, Hat을 배울 때 발음이 비슷한 Bat, Cat, Rat과 함께 파닉스를 익힌다. 그리고 대부분 Hat=모자, Bat=박쥐, Cat=고양이, Rat=쥐 등 뜻은 한국어로 익힌다.
반면 파닉스를 영어로 배우면 Hat=모자그림, Bat=박쥐그림, Cat=고양이그림 등, 뜻을 한국어로 바꿔서 배우는 게 아닌 그림으로 익히기에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단어의 연상작용이 달라진다.
다시 말해 영단어를 한국어로 바꿔서 배우는 것과 그림으로 익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방법이다.
이게 왜 다른지 예시로 설명해 보겠다.
1.
화상수업을 시작한 지 약 5개월이 지났을 때다. 아이들이 escape라는 단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내가 중1 때 배웠던 단어를 초1이 알까 싶었다. 호기심에 escape 옆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 살펴보니 복면을 쓴 도둑놈이 유리창의 창살을 떼고 나오는 그림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둥이에게 뜻을 물어봤다.
"도망치다. 도망가다. 이런 뜻이야~"
내 우려와는 다르게 둥이는 정확하게 뜻을 알고 있었다.
escape라는 단어를 한국어가 아닌 그림을 통해 배우면서 언어적인 뉘앙스를 이해한 것이다. 마치 모국어를 배우는 아이들이 단어를 익히는 것처럼 말이다.
2.
on / under / between / in front of / behind 등 전치사 수업이었다. '초2가 저걸 배운다고? 과연 될까?' 싶은 의구심에 그날의 수업을 자세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30분 만에 5개의 전치사를 숙지한 후, 선생님이 묻는 질문에 대답을 척척 함과 동시에 그림을 보여주면 바로바로 문장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ㅇ_ㅇ
의외로 수업은 간단했다:
흰 PPT에 숟가락 한 개와 테이블, 나무 그림이 있었다. 선생님이 테이블 위에 스푼을 놓으며 The spoon is on the table, 테이블 밑으로 옮기며 The spoon is under the table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무 앞에 스푼을 놓으며 The spoon is in front of the tree, 나무 뒤에 놓으며 The spoon is behind the tree. 그리고 스푼을 두 나무 사이에 놓으며 the spoon is between the trees.
이렇게 한 번씩 그림을 통해 설명해 준 후,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보라고 하자 둥이가 주저함 없이 바로 대답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전치사를 딱 보자마자 이해하고, 즉석에서 문장을 만드는 둥이를 보면서 누군가가 내 머리통을 내리친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이게 이렇게 쉬운 거였어?
이때부터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화상영어를 추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