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콩깍지는 위대하다.'
우리는 매력이 넘치던 말라카를 떠나, 자유로움과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피피 섬으로 갔다. 솔직히 그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더웠다와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운 섬이었다는 거, 그리고 배를 타고 들어갔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딱 그 정도.
사람의 기억은 참으로 신기하다. 훨씬 이전에 갔던 멕시코의 오하카와 싱가포르의 리틀 인디아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이리 선명한데, 며칠이나 머물렀던 그곳의 기억은 왜 이리 희미할까. 아마도 로버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그 신선함이 또는 콩닥거리는 설렘이 떨어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같은 날, 같은 일을 겪었어도 느끼고 기억하는 바가 모두가 다를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추억은 참으로 주관적인 것임이 틀림없다. 때문에 지나간 것에 후회하고 자책하고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이 진짜인지 아님 내가 만들어낸 기억인지 정확히 모르니까. 어쩌면 로버트와 함께 했던 멕시코에서의 추억 또한 나의 호르몬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코피피에서 기억나는 장면이 몇 개 있다.
먼저 긍정적인 장면으로는:
야시장에서의 장면. 사람이 북적거리고, 노점이 쫙 깔린 야시장을 걸으며 둘이서 닭꼬치를 몇 개 먹었던 기억. 인간미 넘치던 야시장을 하염없이 걷다가 세상 행복한 얼굴로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오는 부부를 보고, 우리는 가만히 그 부부를 지켜봤더랬다. 오토바이 뒤의 아이스박스에서 주섬주섬 뭐를 꺼내더니 닭꼬치를 굽기 시작. 역시나 활짝 웃는 얼굴로 굽고 팔더니, 그리 많지 않은 양이었는지 다 팔고, 다시 세상 행복한 얼굴로 사라진 부부였다. 그때 로버트와 나는 그 부부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저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부터, 자기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사는 게 인생을 잘 사는 핵심 Key라고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태국 사람들의 미소가 백만불짜리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저 미소구나 라는 얘기도 나눴던 듯하다.
내가 이곳저곳 여행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바로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이다. 여행을 많이 다니며, 돈이 많고 적음, 국가가 잘 사느냐 못 사느냐, 종교가 이슬람이냐 기독교냐 등은 사실 별로 중요한 게 아니란 걸 경험했다.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내 상황이 어떻든 간에, 그저 내가 있는 상황에 만족하면 남이 보기에 지옥일지라도 겪는 본인은 천국에 있을 수 있음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 말을 들으면 "그럼 만족하며 영원히 거지처럼 살란 말이냐!"라고 반박을 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지구에 태어난 주된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며 평생을 불행하게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
덧붙여, 코피피에서 아주 부정적인 기억이 있다. 나의 분노가 역대급으로 터져 몇 시간이나 난리를 쳤던 부끄러운 기억이랄까.. -_-
말라카를 거쳐 코피피까지. 로버트와 며칠을 함께했는지 모른다. 아무리 연인이라도, 친구라도, 가족이라도 늘 같이 있으면 다툼이 있기 마련이 아닌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로버트의 장점보다 단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실 단점이라기보다 남자의 습성이었던 것인데, 내가 그걸 알 턱이 있나.. -_-
바다랑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야시장에서 이것저것 사 먹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왔다. 빨리 자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대충 씻고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방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자기가 피곤하다고 모든 방 불을 끈 채 먼저 잠든 것이다. 나는 그때 이 포인트에서 분노가 미친 듯이 솟구쳤다. -_-
지금이라면 그냥 조용히 잘 것 같다. 근데 그때의 나는 '사랑 is 배려'라는 공식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던 시점이라.. 우선 화장실에서 늦게 나올 여친을 위해 스탠드 불 하나조차 켜놓지 않았다는 것에 상당히 분노했다. 그 분노는 결국 "니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는 미친 결론으로.. 쏘리 ㅠ_ㅠ
하여 곤히 잠들어 있던 그를 깨워 온갖 헛소리와 잡소리를 해댔다... 나중에는 그가 듣다 듣다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다며 귀에 오로팍스 귀마개를 끼고 다시 잠을 청했다... 오 마이 갓! 그에 다시 분노가 터져 나와 나는 미친* 마냥 더 신나라 칼춤을 추어댔다. 그런 나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곤히 자는 그를 보고, 혼자 씩씩거리며 "너 일어나면 당장 헤어질 거야!"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이런 미친 순간이 계속 있다... 이제 시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어르고 달래서 결혼에 골인한 로버트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너 아니었음 나 진짜 결혼 못했음 -_-
...
한 번씩 감정의 파도가 몰아치는 나를 보고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너는 97프로 천사야. 그리고 3프로는 김치 같아. 아주 매운 김치. 그게 너만의 매력이야."
어머나, 단단한 콩깍지가 아닐 수 없다.
결혼한 지 11년 차가 된 지금,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 분노조절장애가 있어. 정신 차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