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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Kim Jun 02. 2022

방랑 벽의 끝, 결혼 (18)

'그가 없는 일상으로의 회귀.'

 그가 독일로 돌아간 후, 나는 언제 그가 왔었냐는 듯 그저 열심히 회사를 다녔다.  


 싱가포르에 일을 구하러 온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들에게 맞을 법한 직업을 소개한 후 클라이언트와 인터뷰를 주선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좋은 촉을 가졌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주위 동료들보다 성공률이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회사에서 잘하는 사람에게 분기별로 주는 무슨 상도 받고 그랬다. 깨알 자랑 중이다 ㅎ


 헤드헌터라는 일은 사람을 도와주는 것에 무한한 기쁨을 느끼는 나와 참 잘 맞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직업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느끼게 해 준 값진 경험이기도 했다. 그때 당시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세계 경제가 힘든 시기였기에, 생각지도 못한 시련으로 무작정 싱가포르로 넘어와 간절하게 일을 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직업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과연 회사란 곳이 우리가 올인을 하면서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곳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나에게 심어준 경험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이란 사회가 두려워 무작정 싱가포르로 온 20대 중반 청년도 있었고, 정년이 보장되는 공사에 다니다가 인생이 무료해 사표를 내고 싱가포르로 온 30대 초반 남성분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싫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워라벨을 챙기기 위해 무작정 싱가포르로 온 엘리트 여성들도 많이 만났다.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다 CC로 결혼을 하고 부모님의 잔소리 없이 딩크족이 되고 싶어 둘 다 사표를 내고 싱가포르로 온 부부도 있었다.  


 물론 좋은 분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를 회사에서 큰 시련에 빠트렸던 로이터 통신 기자도 있었고, 후보자의 장점을 최대화해 어렵게 싱가포르에 있는 한국 건설회사에 입사시켰으나 자기가 잘나서 된 줄 착각해 입사 후 줄 지각을 하다 2개월 만에 잘린 허세남, 국내 잘생긴 연예인들을 오징어로 만들 법한 외모를 가졌으나 대학 졸업장을 위조해 나타났던 사기남까지 -_-  


 이 많은 이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유명 외국계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잘 나가던 50대 초반의 중년 남성이었다. 이력서를 보면 화려하다 못해 초 엘리트란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던 분. 그럼에도 아무것도 없는 비루한 20대 후반의 나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어딘가 초라하게 위축되어 있었던 후보자라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하셨던 조언은 아직도 생생하다. 


 "회사에 올인하지 마세요. 저는 20년 이상 한 회사에 올인했어요. 그래서 주요 부서의 요직만 왔다 갔다 했지요. 근데 제가 잘릴 줄 누가 알았습니까. 차라리 어릴 때 이직을 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됩니다. 지금 어리시니까 이것저것 경험을 많이 해보시고, 이 회사가 나를 끝까지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일하세요."  


...


 요즘 MZ세대들이 이전 세대들과는 많이 다르다며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듣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들은 요즘 시대에 맞춰 성장한 굉장히 똑똑한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주요 요직에서 승승장구하다가 회사가 어려워지니 바로 내침을 당한 저 50대 남성의 삶보다는 워라벨을 중시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소소하게 사는 그들이 옳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물론 초 개인적이라 어찌 보면 이기적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래도 노예처럼 사는 것보다는 한 번 사는 인생 나의 행복을 위해 사는 그들을 나는 응원하고 싶다. 


 내 아들은 지금의 MZ세대보다 더 개인적이고, 훨씬 주장이 강한 아이들이 될 것이다. 어른들께 위축되지 않고 말을 잘하는 아이들을 보면 놀랍고, 어른이 주는 음식도 먹기 싫으면 단호하게 안 먹는다고 선을 그을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이 아직도 낯설다. 그만큼 나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또 착한 아이 컴플렉스로 똘똘 뭉친 옛날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아이들의 모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다만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모두와 어울릴 수 있는, 그리고 아닌 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인성이 좋고 강단이 있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


 그곳에서의 1년 5개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또 그들의 인생을 아주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다. 뒤돌아 보면 참으로 소중하고 감사했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로버트가 독일로 돌아간 후 약 3개월이 지나 그곳에 사표를 제출했다. 어차피 경험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었고, 또 이곳에 입사할 때부터 딱 1년만 경험 삼아 일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미리 얘기했던 터라 그리 미련이 크지 않았다. 


 사표를 내자 나를 좋아해 주던 상사는 아쉬워하며 한 말씀을 해주셨다. 


 "네가 일했던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어. 리먼 사태만 아니었다면 훨씬 더 즐겁게 일할 수 있었을 거야. 지금보다 2배는 더 보람차고 즐거웠을 텐데 많이 아쉽다."


저는 충분히 보람찼고 또 즐거웠습니다.

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사표를 낸 후 나는 나의 마지막 20대를 불태우기 위해 베트남과 미얀마로 약 3주간 나 홀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도 많은 분들을 만나고 또 특별한 경험도 했는데, 이 썰은 다음 회에 풀겠다. 


 어쨌든 3주간의 배낭여행 이후 로버트를 보러 독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약 2주 반 동안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보고, 이놈이 진짜 괜찮은 놈인지 알아보기 위해 말이다. 참고로 철벽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언제든 그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나 독일에서의 그의 모습에 너무나 큰 실망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를 차 버렸으니까.   


일단 여기까지만 하겠다.

To be continued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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