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바콜로드 생활기록 1.
'8주간 생활하고 경험하고 여행하면서 영어 공부도 하기.'
지금 나는 필리핀 바콜로드에 있다. 바콜로드는 세부 옆에 위치한 섬으로 도시라기보다는 조금 큰 마을, 또는 도시를 흉내 낸 시골이라는 단어가 더 잘 맞을 법한 곳이다. 내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이 섬에는 산과 바다가 있기에 초등학생 아이들이 이곳에 살면서 이런저런 자연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게 됐다.
그리고 또 다른 목적은 바로 영어 공부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학원에서 영어를 주입식으로 배우는 걸 원치 않았다. 때문에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원을 보내는 대신, 주 3회 30분씩 필리핀 선생님에게 화상으로 영어를 배우게 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알아듣고, 영어 책도 곧 잘 읽고, 또 표현도 제법 가능한 것 같아 나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 겨울에 처음으로 필리핀에 들어오게 됐다.
집은 바콜로드에서 부촌으로 소문난 타운하우스에 있는 방 5개, 화장실 3개인 주택을 빌렸다. 안전할 뿐 아니라, 이곳 커뮤니티 센터에 큰 야외 수영장이 있고, 또 집 근처에 쇼핑센터가 있기에 살기 편해 보여 이곳을 선택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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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약 20년 전 -_- 그래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간 사람들은 나름 수능 공부를 했던 이들이 아닌가. 나도 뛰어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수능 상위 10프로 정도는 들었던 사람인지라 영어를 나름 열심히 했던 인간이었다.
그랬던 내가 21살 겨울 방학 때 워크캠프를 통해 네팔로 해외봉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정말 영어를 단 한마디도 못하는 나를 보고 스스로에게 엄청난 자괴감이 들었더랬다. 봉사자 중 60대 미국 할머니가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나랑 이야기를 하려고 어찌나 천천히 말씀해 주셨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한 마디도 못했다. 알아들으면 뭐 하겠는가, 말 한마디를 못하는데 ㅠ_ㅠ
그때 나름 충격을 받고 한국에 와서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필리핀 어학연수가 가성비가 최고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일단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거의 1인자급인지라 나는 바로 마닐라 퀘존시티에 있는 영어학원을 알아보고 그 해 여름방학 때 고딩 친구 2명을 데리고 한 달간 필리핀 어학연수를 떠나게 됐다.
어딜 가나 인복이 좋은 나는, 그 학원에서 '필리핀-캐나다 혼혈'인 남자 선생님한테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좋아해 주셔서 (도끼병이 아닌 팩트임 -_-) 내가 머물고 있던 하숙집에 밤마다 1시간씩 전화를 걸어주셨다. 매일 4시간씩 학원에서 1:1로 영어를 배우고, 집에 와서 또 2시간 개인 튜터한테 수업을 받고, 저녁에는 그 선생님이랑 1시간씩 영어로 떠드니 그야말로 나의 영어는 한 달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어가 이리 재미있는 학문임을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곳에서의 경험이 내 인생에 큰 획을 그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배운 한 달 영어로 배낭여행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 '영어가 이렇게 재미있는 것인지 미리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학원 대신에 영어회화로 영어를 배웠으면 이리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하는 아쉬움도 들었더랬다.
어쨌든 그 경험 후에 하나 다짐한 것이 있었다. '앞으로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절대로 영어 학원을 보내지 말고, 그 돈으로 매년 필리핀에 와서 가르치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걸 잊지 않고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실천을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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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필리핀에서 영어를 배우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영어학원에 등록하기와 개인 튜터 고용하기이다. 두 방법 모두 장단점이 있는데, 우리 아이는 일단 아직 어리므로 학원에 가게 되면 매일 6~8시간씩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맞지 않은 것 같아 나는 개인적으로 튜터를 고용해서 영어를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잠깐! 학원과 개인튜터의 장단점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 학원은 이미 짜인 커리큘럼이 있어, 그냥 맡기기만 하면 된다. 하여 아이들에게 맞는 책을 준비할 필요가 없고, 검증된 경험이 있는 선생님이 있기에 부모님들이 신경을 쓸 필요가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학원으로 가게 되면 일 6시간 또는 8시간 이렇게 정해진 스케줄이 있고, 또한 여행을 하게 되어도 수업을 빼기가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매달 영어공부를 위한 비자비를 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매달 10만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 개인튜터는 집으로 와서 직접 가르치기에 컨트롤하기 쉽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선생님한테 오지 말라고 하면 되고, 하루에 3시간을 하든, 6시간을 하든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그리고 비자 비용도 들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선생님들이 부모님과 같은 집에서 공부를 가르치기에 딴짓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다만 아이들 레벨에 맞은 책을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가야 하고, 또 검증된 선생님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개인 튜터를 여기 와서 구하면 쉽지 않을 것 같아, 필리핀에 들어오기 전에 몇 명의 선생님과 면접을 보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선생님들한테 무료 수업을 받아본 후 아이들의 선생님을 미리 정해서 들어왔다. 그리고 저번 주 월요일부터 주 5회 하루 4시간씩 수업을 시작했는데, 딱 일주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만족, 만족, 대만족이다.
덥고 습한 나라이고, 아무리 부촌이어도 주택인지라 집 안에 손가락 두 개 만한 바퀴벌레가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고 한국에 가고 싶었는데, 지난주 월요일에 아이들이 수업을 시작한 순간, 모든 괴로움과 힘듦은 싹 씻은 듯이 없어지는 경험을 했더랬다. -_-
사실 바퀴벌레만 괴로운 게 아니다. 세탁기가 얼마나 구식인지, 세탁기를 5번 돌려도 떼가 빠지지 않아, 매일 아침마다 2시간씩 발빨래를 하고 있는 나이며, 쇼핑센터에 있는 슈퍼마켓의 물가는 또 얼마나 비싼지, 몇 개 샀는데 20만 원이 나와 엄청 당황하기도 했다. 서울에 있는 할인마트에서 샀으면 12만 원어치 정도 됐을 법한 물건이었는데 말이다 ㅠ_ㅠ
앞으로 남은 기간도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영어를 즐겁게 가르치고 싶은 나의 열정이 꺼지지는 않으리 -_-
어쨌든 이제부터 나의 필리핀 바콜로드 생활기를 조금씩 올려보고자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