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물가에 대한 단상
'누가 필리핀이 싸다고 했는가 -_-'
필리핀 바콜로드에서 2주 넘게 생활하면서 필리핀의 살인적인 물가에 놀라고 있는 중이다. 첫날, 마닐라 공항에서 나와 국내선으로 이동하기 전, 웬디스에서 간단한 햄버거 세트를 시키고 돈을 내려니 총 1500페소라 당황했더랬다. 약 37500원을 낸 셈. 이 햄버거가 버거킹처럼 퀄리티가 좋은 버거였으면 그러려니 한다. 우리가 먹은 것은 야채 하나 들어있지 않고, 패티와 빵뿐인 버거였기에. 게다가 롯데리아의 불고기 버거보다 작은 양 -_-
바콜로드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 근처 큰 마트에 갔다. 많이 사지도 않고 그냥 하루 이틀 치 먹을 걸 이것저것 사니 3300페소가 나왔다. 약 82500원. 참고로 마트에서는 오이 2개에 230페소, 약 5850원에 팔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의문이 들기 시작.
바콜로드에 사는 필리핀 친구한테 전화하여 이 물가가 진짜냐고 물어보니, 로빈슨 몰에 있는 슈퍼에 가면 조금은 저렴할 거라고 얘기해 주었다. 하여 바로 다음 날 우리는 트라이시클(?)을 타고 로빈슨 몰로 달려갔다. 가격이 괜찮다는 말을 듣고 이것저것 담기 시작. 세제도 사야 하고, 휴지, 소금, 스파게티, 페스토, 토마토소스, 오일, 우유, 치즈, 빵, 딸기잼, 키친타월, 야채, 고기, 과일 등을 구매했다. 그리고 당당히 계산을 하러 갔는데, 여기서 8700페소(217,500원)가 똬악 -_- 허허허허. 솔직히 같은 양을 한국 할인마트에서 샀으면 약 12~13만 원 정도가 나왔을 거라 예상한다. 또 같은 양을 독일에서 샀으면 약 8~9만 원이 나왔을 거라 본다. -_-
필리핀 물가가 너무 비싸다고 아이들의 선생님과 친구에게 계속 노래를 부르니, 그들이 시장에 가면 저렴하니 Local market으로 가보라고 했다. 하여 우리는 바로 다음 날 근처의 로컬 마켓에 갔다. 그곳은 물론 마트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그러나 한국과 비교하면 그리 저렴한 가격도 아니었다. 마트에서 오이 2개가 5500원이라면, 시장에서는 4000원 정도라고 해야 하나. 과일과 야채를 작은 봉지에 담아서 15000원 정도 냈으니 한국의 시장에서 산 것보다 비슷하거나 약간 싼 정도. 더운 나라라 야채와 과일이 저렴하리라 생각했지만, 내 예상은 이번에도 빗나갔다.
이틀간 쓴 돈을 보고, 이거 한국에서 가져온 돈으로는 어림도 없겠다 싶어 일주일에 얼마를 쓸지 알아야 할거 같아, 가계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백패커처럼 미니멀하게 생활하는 사람이라 평생 가계부를 작성한 적이 없다. 근데 당황스러운 필리핀 물가가 나를 가계부의 세계로 이끈 것이다.
매일 얼마를 썼는지 적어 놓고, 며칠 전 약 2주간 쓴 생활비를 계산해 보니, 일주일에 약 70~80만 원은 쓴 듯하다. 물론 영어 선생님 비용은 제외한 돈이다. -_- 필리핀 물가는 전혀 저렴하지 않다. 이 나라에서는 저렴한 것이라고는 인건비뿐이다.
몰에 가면 한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 10명은 있어 보인다. 너무 많은 종업원이 있어서 그런지, 그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거나, 지나가는 외국인을 구경하며 이야기는 하는 모습이 일상인 것처럼 보일 정도. 사실 일을 하고 있는 종업원을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냥 하루종일 그곳에 서있고, 하루에 약 5~7천 원 정도를 받으면 되니까.
살인적인 물가에 하루 인건비가 5천 원이라.
...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현지인 친구 가족을 집으로 초대해 닭볶음탕을 대접했다. 내 친구, 그녀의 남편, 그녀의 여동생 그리고 그녀의 아들 이렇게 4명이 왔다. 친구는 방콕 국제학교에서 15년간 영어 & 수학 선생님으로 일을 하다가 2년 전 필리핀으로 귀국을 했고, 그녀의 남편은 유조선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현지인에 비해 굉장히 돈을 잘 버는 사람이다. 그리고 방콕에서 일하고 잠깐 휴가 차 바콜로드에 방문한 그녀의 여동생도 초대하는 김에 같이 오라고 했다. 이렇게 이 가족은 모두 해외에서 일을 했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로 소위 필리핀의 상위층이라 할 수 있다. 그들과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역시나 나의 핫 토픽인 필리핀 물가 이야기가 나왔다.
"이 나라 절대 저렴하지 않아. 사람들 인건비는 이리 싼데 물가가 이렇게도 높아서 다들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라고 하자 내 친구가 이야기했다.
"생각해보니까 필리핀이랑 태국 물가가 같아. 근데 태국은 인건비를 필리핀보다 최소 10배를 더 주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살기가 더 좋은듯해."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또 한마디를 했다.
"필리핀은 정치가 썩어서 그래. 시장을 남편이 했다가 부인이 했다가 아들이 했다가 딸이 했다가 또 남편이 했다가 하면서 계속 돌아가면서 하는 나라거든. 그리고 그거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지. 바콜로드도 그래 ㅎㅎ"
-_-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총제적 난국이라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
12월 30일에는 우리 아이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가르치고 계시는 선생님들을 한국 식당으로 초대해 점심을 대접했다. 선생님 중 한 명은 태국 공립학교에서 과학과 영어를 10년간 가르친 경험이 있는 분이고, 나머지 2명은 20대 중반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친구들이다.
역시나 밥을 우적우적 먹으며 나는 어린 선생님들께 얘기했다.
"이렇게 물가가 비싼 나라에서 돈은 너무나 조금씩만 받고 일하는 거 불공평하다고 느끼지 않니? 너희 젊은 애들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 이런 구조는 결국 마트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만 이익이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 그리고 라인이 없는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기회가 오지 않을 거 같고. 기회가 되면 외국으로 나가봐. 거기는 같은 물가에 월급은 최소 10배가 많대. Jean, 이 친구들한테 해외에서 일하는 노하우 좀 알려줘. 정보가 있으면 좋을 거 같아."
방콕에서 10년간 일을 했던 Jean이 말했다.
"응, 나도 코로나 때문에 다시 귀국했지만 이제는 나가야지. 우리 가족들이 풍족하게 먹으면 좋겠거든. 그래서 지금은 대만으로 가는 비자를 신청해서 기다리는 중이야. 대만의 물가는 태국이랑 비슷한데, 태국보다 월급은 6배는 더 준다고 하더라. 올해 말에는 대만으로 갈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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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보홀로 가기 위해 바콜로드 공항에서 대기 중이다. 오늘 새벽 6시에 택시를 예약하고 서둘러 공항에 왔다.
동이 트는 새벽하늘 아래, 달리는 차 안에서 끝없는 사탕수수밭을 보자니 참 평화로웠다. 달리면서 나와 로버트 그리고 택시 드라이버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드라이버가 한 말 중에 인상적인 부분을 적는다.
"이 넓은 사탕수수밭은 한 가족이 소유하고 있어요. 그리고 저 넓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최저임금보다 적은 금액으로 하루종일 일하지요. 그 사람한테 아이가 한 명이라도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살기 힘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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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 비정제 설탕인 마스코바도는 대부분 바콜로드에서 만들어져 수출된다고 한다. 그리고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식품이기에 이는 아주 큰 수입원일 수밖에. 그러니 한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이 드넓은 밭이, 서민들이 먹을 수 있는 야채와 과일로 채워지기보다는 사탕수수만 심어지는 게 어쩜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이곳의 야채와 과일이 왜 이리 비싼지, 위 이유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드넓은 논밭에 서민들을 위한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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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미래가 찬란해지길, 필리핀 사람들이 해외가 아닌 자국 내에서 일해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들에게 자비롭고 애민사상으로 가득한 참 정치인이 한 번쯤은 꼭 나오길 진심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