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의 낮 (신유진)을 덮으며
해나의 책장을 덮으며
'눈물의 무게와 질량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계 속의 감정은 단순하지 않다.
겹겹이 층이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안하고, 그리움 속에도 연민이 있고,
사랑을 위해 애를 썼으나 사랑이 끝나고 고작 남은 마음이 미안함이어서 미안한 마음.
그 겹겹의 층을 소품과 풍경 속에 풀어내는 동안 시간도 공기도 천천히 흘러간다.
신유진 작가의 [열다섯 번의 낮]을 읽는 시간도 그랬다.
겹겹의 층을 잘 포착하고 정성껏 풀어낸 열다섯 편의 단편 속에 한 겹으로 쉽게 정리할 수 없는 마음들이 교차한다.
한 편 한 편이 그렇게 단단하게 응축되어 있어서 거의 모든 꼭지를 깊이 공감하며 읽게 된다.
사진을 정리하며 들춰보게 된 1993년의 잔상과
2012년 결혼식을 앞두고 찍은 사진을 보며 자신이 같은 표정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마음이 아리다.
엄마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깊은 그녀의 삶도 엄마의 삶만큼 눈물이 많았나 보다.
'눈물의 무게와 질량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돈하지 못한 나의 눈물은 바닷물처럼 짰고,
세월만큼 몇 번을 걸러내 맑아진 엄마의 눈물은 담수처럼 맑았다.'라고 자신과 엄마에 대해 정리해내기까지 어떤 마음들을 통과해냈을지 짐작해본다.
마음 한 켠에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관찰자가 된다.
그래서 연민은 다정하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것들을 쓰고 싶다'는 작가의 시선에 공감해 남 같지 않은 마음으로 열다섯 편의 단편을 읽었다.
그녀가 들여다보고 글 속에 붙잡아 두고자 했던 것들을 함께 하는 마음으로 성실히 들여다보았다.
내겐 소외된 것들을 배제하지 않는 마음이 삶을 받쳐준다는 믿음이 있다.
타인의 민낯도, 나의 초라함도 소외시키거나 외면하지 않고 싶다.
정직한 시선과 여린 마음은 나와 당신의 세상을 단단하게 할 거니까.
그래서 좋았다. 작가가 포기하지 않고 바라보는 소외된 것들, 기어이 써 내려간 그 세계는 내게 아름다웠다.
나치였던 할아버지가 죽인 '로자'에 대해 기어이 써야 했던 그 애에 대해 말할 때,
남편과 아들의 무덤에 놓을 꽃까지 부탁할 수 없어 자신의 무덤에도 꽃을 놓지 말라고 말했던 친구, 생을 다한 마리안의 장례식에서 그녀를 애도할 때,
늙은 배우 세르지오의 비극적인 마지막 무대를 보면서도 '평생 광대로 살고 싶다'는 꿈을 이룬 그의 삶에서 기어이 희망을 찾아낼 때,
내가 이 작가의 시선을 공감하고 이 책을 오래 좋아하고 들춰보겠구나 예감했다.
인생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슬프고 쓸쓸하고 초라한 빛깔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평론가의 책 제목인데 내겐 이 책이 꼭 그랬다. 단단한 슬픔이었다.
자신의 초라함과 슬픔을 회피하지 않고
타인의 비탄과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존중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강단을 가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슬픔을 공부한다.
내 모든 역경의 시간마다 머뭇거리다 피하지 않고 고요히 지나가길 기다린다.
견디기 힘든 시간을 견디는 동안 내 안에 차오른 마음을 단단히 하여 나의 초라함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견딜 수 있게 되면 타인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배워가는 것일 거다. 슬픔과 역경을 통해서.
마지막 꼭지 [여름의 맛]을 통해 마무리하고 싶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잘 담겨있는 부분 이리라 짐작해 본다.
#해나의책장을덮으며
괜찮다.
안 괜찮을 건 무엇인가?
여름이 이렇게 가 버렸다고 한들, 몇 번을 보냈고 몇 번을 이겨 낸 여름인데, 그러니까 나는 모든 게 괜찮아졌다고 생각한다. 큰 변화는 없었다.
모두 아주 작은 것들에 불과하다.
행복을 구걸하지 않고 불행을 내뱉지 않는 법을 배워 갈 뿐이다.
나를 흔드는 것에 조금은 덜 동요하며 하루를 산다.
그래서 지금 어쩌면 괜찮지 않을 당신에게, 언젠가 내가 해변에서 태양과 함께 끌어안았던 책 한 구절을 보내고 싶다.
'그러니 제발 당신의 삶도 괜찮길 바란다.'
괜찮아질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다.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