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는 자기만의 힘과 생각을 키우는 최초의 공간, 작은 세계. 아무튼, 메모는 메모를 통해 삶의 목적을 구체화해가는 한 문장 수집가의 깊이 있고 내밀한 메모장이다.
좋은 기획자가 되고 싶어 읽고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좋은 관점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은 관점은 좋은 시선과 태도에서 나오기에, 읽고 쓰는 것만큼 생각을 정리하고 태도를 돌아보는 시간들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알게 되었다. 읽고 쓰고 사색하고 기록하는 것은 한 사람의 직업적 성장을 도울 뿐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와 폭을 변화시킨다는 걸.
CBS 라디오 피디이자 작가로 활동 중인 정혜윤 작가의 [아무튼, 메모]를 읽으면 작가가 어떤 메모로 형성된 사람인지, 어떤 문장들을 메모해왔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그녀는 인간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고 싶었고 그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녀가 찾은 메모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의 내일은 오늘 내가 무엇을 읽고 기억하려고 했느냐에 달려있다. 내가 밤에 한 메모,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나의 메모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발을 땅에 딛게 하는 힘, 그 땅에서 발을 떼게 하는 힘, 둘 다 바로 메모였다." p.36
정혜윤 작가에게 메모는 성장의 토대였다. 삶의 새로운 원칙과 시선으로 가득한 메모는 우리에게 딛고 날아오를 토대가 되어준다. 그리고 변화는 매일매일의 '단련'의 결과이다. 메모는 자기만의 힘과 생각을 키우는 최초의 공간이며 작은 세계이다. 이 메모를 기반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글쓰기를 훈련하며, 아픈 시절을 견뎌내고, 바라는 것을 현실로 구체화시킨다. 위기의 순간에 말들이 오히려 더 간절하게 들리기에 괴로움 속에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메모를 한다. 그녀의 메모 속에서 아름다운 위로가, 기발한 소설이, 환경과 제국주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들어야 할 진실이 소개되기도 한다. 작은 메모의 씨앗이 없었다면 듣지 못했을 이야기들, 들어야 하고 알아야 하는 이야기들이 되기도 한다.
그녀가 무명의 친구에게 "지금 어디선가 고래 한 마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위로의 문장을 건넬 때, 조선의 사형수 이학래가 가슴에 품고 다닌 사형당한 조선인 스물세 명의 명단을 이야기할 때 그 문장들은 나의 노트에서 다시 씨앗이 되었다. 나는 파도를 견뎌내야 할 때, 남겨진 자의 죄책감과 슬픔을 위로해야 할 때 이 문장들을 기억할 것이다.
메모는 자기만의 힘과 생각을 키우는 최초의 공간이고 작은 세계이다. 정혜윤 작가의 삶의 태도와 시선이 오롯이 담긴 [아무튼, 메모]는 얇지만 얕지 않고, 작지만 깊다. 좋은 시선과 좋은 태도, 좋은 필력을 가진 작가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세상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시선에 기대어 좋은 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을 구체화시킨다. 이런 기획과 이런 글이 바로 좋은 기획이라고. 인간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고, 그 일에 보람을 느끼며 연대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쓰는 거라고.
#해나의책장을덮으며
행복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놀라운 우여곡절 끝에 정직한 통로를 거쳐서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그 정직한 통로라는 말이 얼마나 심오한 것인지 마음으로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길을 잃으면 메모장을 펼쳐보겠다. 메모를 하는 우리 마음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조약돌을 뿌리는 헨젤과 그레텔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달빛에 비친 조약돌은 우리를 가야 할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p.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