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정세랑 작가 시선으로부터
따뜻한 인터뷰어였던 그녀
몇 년 전 릿터 잡지를 통해 정세랑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작가들과의 인터뷰 코너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때 작가님이 바라보는 시선과 인터뷰이들에게 이끌어 내는 질문들,
그리고 인터뷰를 정리한 글이 너무 좋았다.
그때부터 팬이 되어 저는 작가님의 전작을 읽는 독자가 되었다.
나는 작가님의 책 중 피프티 피플을 제일 좋아하는데
최근 읽은 책 [시선으로부터]는 피프티 피플의 가족 버전 같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세랑 작가님의 작품 중 이 책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 하와이로 이주해
독일 예술가 마티어스에게 발탁되어
독일로 가게 된 심시선이라는 인물이 하와이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한국으로 흘러오는 동안 겪었던 많은 일들과
그녀와 연결된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의 다양한 사연이 소개된다.
이 속에는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 심시선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가를 이루며
살아온 삶의 흔적과 예술계 내 권력의 작동 방식이 녹아 있다.
그리고 심시선 일가의 구성원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한국 사회를 감아도는 따가운 혐오의 공기와
제국주의와 생태주의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마주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aAdiBUFlas
책의 줄거리
심시선의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이다.
하지만 시선의 딸 명혜는 하와이에서 시선의 10주기
제사를 지내자고 제안하고 가족들은 하와이에 모인다.
제사의 방식은 특별해서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왔었구나 싶을 만큼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와서
시선의 제사상에 놓는 것'입이다.
그들은 젊은 시절 시선이 걸었던 섬을 걸으며
시선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각자 하와이를 여행하는 동안
시선의 인터뷰와 그녀의 글이 소개되고,
시선의 제사상에 올릴 보물을 찾는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교차되며 책이 전개된다.
시선으로부터의 시선
시선에게는 세 명의 남자와 네 명의 자녀,
다섯 명의 손자, 손녀가 있다.
그의 첫 번째 남자는 마티아스 마우어,
폭력적이고 잔인한 인물이지만
세상에서는 호평을 받는 예술가였다.
예술계 내의 권력자인 마티아스의 노리개처럼
고통을 겪는 시선,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이방인 요제프 리는
마티아스의 폭력 속에서 서로 연대하게 되고
서로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된다.
그와 함께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오게 된 시선은
한국에서 그림이 아닌 글을 쓰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한국이라는 이국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요제프 리는 시선과 이혼 후 독일로 돌아간다.
그리고 군사정권 시대에 열린 시선을 가졌던
광고업계 인사인 홍낙환과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사건은
첫 번째 남자인 마티아스 마우어의 폭력성이다.
그는 시선에게 폭력을 가하고 괴롭히고
지능적인 방식으로 시선을 가해한다.
그녀가 자신을 떠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살을 하며 모든 유산을 시선 앞으로 남긴다.
이로 인해 시선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예술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마녀가 되어
세상의 악평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시선의 가족들은 이 일의 진실과
시선의 진심을 알아주고 시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당시에는 가스 라이팅이나 PTSD 같은 말들이 정의되지 않던 시대였다.
나는 시선을 보며 우리 윗세대를 많이 생각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가지게 된
모질고 억척스러운 성향들.
우리 세대는 많이 배워서
자신을 돌보는 레퍼런스도 의학적인 도움도 풍부해서
우리의 감정을 알고 그 동인을 해석할 줄 알지만
윗 세대는 그렇지 못했고 그래서 그 표현들이
굉장히 억척스럽고 완고하게 표현되는 것 같다.
시선은 폭력과 억압에 순종하지 않았던 여인이다.
세상의 악평을 견디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단단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세상의 난폭함을 향해 과격한 목소리를 던지지만
약한 것들을 향해서는 다정한 목소리를 낸다.
책에서 그녀의 다양한 인터뷰와
그녀가 저술한 책 속 문장을 통해
그녀의 따뜻하고 단단한 성정을 읽어낼 수 있다.
나는 시선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정세랑 작가의 모든 언어들을 참 사랑한다.
시선의 긴 견딤과 단단함을 써 내려가는 언어 속에는
이 인물에 대한 작가의 깊은 연민과 사랑이 담겨 있어서
읽으면서 많이 먹먹하고 또 위로를 받게 된다.
나는 이런 식으로 깊게 바라보고 따뜻하게 이야기하는
정세랑 작가님의 방식을 정말 사랑한다.
시선으로부터 가족으로 확장되는 이야기들
이 책의 중의적인 제목은
시선으로부터 전달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시선으로부터 확장되는 가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선의 가족들은 하와이에서
시선의 제사상에 올릴 보물을 찾으며
각자의 이야기, 시선에 대한 추억들을 회상한다.
그리고 각자가 찾은 보물이 각자의 인생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시선의 가계도를 보면 전혀 평범하지 않다.
보수적인 시대에 시선은 유럽을 떠들썩하게 한 연애를 하고 두 명의 남자와 재혼을 한 시선의 이력도
그런 시선의 밑에서 자라난 가족들도
그냥 보편적인 캐릭터들은 아니다.
하지만 읽다 보면 가족들이 세상이 바라보는 편견과 시선이 아닌 자신들의 마음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기준으로 세상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가족의 보편적이지 않은 부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콤플렉스나 결핍으로 병든 인물들도 없다.
오히려 보편적이지 않은 것을 자기식으로 비틀어서
해석하는 사회의 편견이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특징은 이 책뿐만이 아니라 정세랑 작가님 책에 등장하는 캐릭터 표현의 보편적인 특징이다.
우리 각자가 가진 결핍이나 아픔에 대해서
'그럼 뭐 어때? 우리는 우리 나름으로 잘 살아갈 거야.'
하고 말할 수 있는 건강한 이해와 연대의 마음이
계속해서 싹트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메모리얼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가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 일궈낸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가족들,
예술계 내의 권력의 작동 방식이 단단한 성벽 같아도
여성 후배들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말하던 시선,
한국 사회를 감도는 따가운 혐오의 공기에 맞서
자신이 겪었던 일과 기억들, 상처를 글로 남긴 사람,
그녀의 글을 읽으며 시선을 이해하고 추억하며 애도하는 시선의 일가들. 젊었던 시선이 걸었을 길을 걸으며
시선을 생각하는 가족들.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사람들은
지지 않고 꺾이지 않는다.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사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그들 안에 있으니까.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책의 마무리의 작가의 말에서 정세랑 작가는 말한다.
"나의 계보가 김동인이나 이상인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음을 깨달은 몇 년이었습니다."
시선으로부터 시작해 시선의 딸 명혜와 명은,
재혼으로 얻었지만 공평한 사랑을 받은 딸 경아,
그리고 시선의 손녀 화수와 우윤이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설 때까지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이야기들은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메모리얼이었다.
해나의 한 줄 요약 :
시선으로부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메모리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