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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읽기 좋은 에세이 추천 1편

말들의 흐름 시리즈 4편 시와 산책(한정원) | 시간의 흐름

by 해나책장

겨울의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에세이 두 편을 소개하고 싶어 준비한 기획이다.

첫 번째 소개하려는 책은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



https://www.youtube.com/watch?v=gVNTx4PuBv0




이 책은 말들의 흐름 시리즈 네 번째 책이다.

이 '말들의 흐름' 시리즈는 단어를 따라 흘러가는 재미있는 기획의 책이다.

정은 작가님의 커피와 담배를 시작으로 이 담배라는 단어를 이어받아서

금정연 평론가님이 담배와 영화를,

이 영화를 정지돈 소설가가 이어받아서 영화와 시를,

그리고 이 시를 이어받아 시와 산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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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와 산책으로 이 시리즈에 입문했는데

올해 읽은 가장 좋은 에세이 중 한 권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일상을 천천히, 풍부하게 걸어가며 채워가는 마음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산책, 시, 글쓰기, 대화,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내 마음에 무언가를 남기도록 하는 것.

그걸 굉장히 성실하게 잘 한 분이 이 책의 저자인 한정원 작가님이 아닐는지.

읽다 보면 깊은 시선과 성숙한 마음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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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우주보다 더 큰





'온 우주보다 더 큰'은 이 책의 첫 번째 꼭지이다.

나는 이 챕터와 '국경을 넘는 일'이라는 챕터를 제일 좋아했다.

이 꼭지는 눈 내린 어느 하루를 배경으로 시작해 산책길로 이어지고

페소아의 시와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사랑을 잃은 사람의 마음과 그리움을 오롯이 내 마음에 가득 채워

내 마음은 온 우주보다 더 크다는 사색을 아름답게 그려낸 글이다.

이 첫 꼭지를 읽으면 이 겨울의 낭만적인 계절감을 확 느끼면서 시작하게 된다.

작가는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 사람의 마음은 가장 커진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페소아의 시를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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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선 죽음이요

이 세계의 슬픔이다.

이 모든 것들, 죽기에,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이 온 우주보다 조금 더 크다. _페소아'



이 우주보다 큰 마음을 작가가 어떻게 사색했는지 작가님의 언어로 살펴보자.



'텅 비워진 공간에서 어찌할 바 모르고 슬퍼하던 시인은,

그 공간으로 시간을 데려오기로 한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내가 잃은 것도 내 안에 존재한다는

초월적인 시간에 바쳐진 마음은 이제 우주보다 더 커진다.

그렇게 커진 마음은 더는 허무하지 않다.

수만 년 전에 죽은 별처럼,

마음속에 촘촘히 들어와 빛나는 것이 있어서이다.

눈은 흰색이라기보다 흰빛이다.

그 빛에는 내가 사랑하는 얼굴이 실려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멀어도, 다른 세상에 있어도,

그날만은 찾아와 창밖에서 나를 부르겠다는 약속 같다.

그 보이지 않는 약속이 두고두고 눈을 기다리게 한다.

내일은 눈이 녹을 것이다. 눈은 올 때는 소리가 없지만,

갈 때는 물소리를 얻는다.

그 소리에 나는 울음을 조금 보탤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내 마음은 온 우주보다 더 크고,

거기에는 울음의 자리도 넉넉하다. (온 우주보다 더 큰)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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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올 때는 소리가 없지만, 갈 때는 물소리를 얻는다.

그 소리에 나는 울음을 조금 보탤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내 마음은 온 우주보다 더 크고, 거기에는 울음의 자리도 넉넉하다.'


이 부분을 읽으며 뭉클.

내 울음의 자리도 넉넉하고 내 마음은 온 우주보다 크다니.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의 꼭지가 하나하나의 정성껏 성실하게 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산책이 시가 될 때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산책과 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 일상에 많이 배어있는 습관 같은 단어들이다.


이 '산책이 시가 될 때'라는 꼭지에서는 인디언 소녀가 친구에게 자신의 집으로 오는 길을 설명하는 장면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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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내가 당신이라는 목적지만을 찍어 단숨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소한 고단함과 아름다움을 거쳐

그것의 총합이 당신을 만나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고양이들이 밤에 몸을 누이는 장소, 열매를 기대해볼 수 있는 나무,

울다가 잠든 사람들의 집...

산책할 때 내가 기웃거리고 궁금해하는 것들도 모두 그렇게 하찮다.

그러나 내 마음에 거대한 것과 함께 그토록 소소한 것이 있어,

나는 덜 다치고 오래 아프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의 폭력과 구태의연에 함부로 물들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

(외면이란 사실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인간은 내면과 내면과 내면이 파문처럼 퍼지는 형상이고,

가장 바깥에 있는 내면이 외면이 되는 것일 뿐.

외모에 관한 칭찬이 곧잘 허무해지며

진실로 칭찬이 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려면 이렇게. 네 귓바퀴는 아주 작은 소리도 담을 줄 아는구나,

네 눈빛은 나를 되비추는구나,

네 걸음은 벌레를 놀라게 하지 않을 만큼 사뿐하구나).

그런 다음 나의 내면이 다시금 바깥을 가만히 보는 것이다.

작고 무르지만, 일단 눈에 담고 나면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단단한 세계를.

그러므로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보이는 거리는 좁지만, 보이지 않는 거리는 우주만큼 멀 수 있다.

'나'라는 장시는 나조차도 미리 짐작할 수 없는 행동을 붙이며 느리게 지어진다. (산책이 시가 될 때) p.25




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들고,

외면은 내면과 내면과 내면이 파문처럼 퍼지는 현상일 뿐이라는 사색이 무척이나 공감되었던 부분,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 내가 감각하는 것의 총합이 나를 이루는 것 같다.




국경을 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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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는 너무 슬퍼서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 '내게서 말을 훔쳐간 것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아올 힘이 내겐 없었다'라고 표현한다.

나에겐 큰 트라우마를 넘어와야 했던 일 년이 있었는데 그 시절의 내 마음이 이랬다.


이 챕터에서 무언극 배우인 마르소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

작가는 힘든 시기에 이 마르소의 이야기를 많이 생각했다고.


무언극 배우인 마르소는 프랑스 태생의 유태인이다.

나치가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발각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숨지게 된다.

마르소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동시에 연기와 팬터마임에 계속 관심을 가진다.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서 고아원에 있던 유대인 어린이들이

중립국인 스위스로 무사히 넘어가도록 돕는다.

아이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보이스카우트 리더 흉내를 내며

모두가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 작가에게 이 이야기가 위안이었고

자신의 슬픔도 모험 같은 것이라 느끼며 계속 걸어갔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 슬픔이라는 국경을 넘어가게 된 날을 기억하며 글을 쓴다.



'긴 시차와 공간의 폭을 두고 살아가는 나도 마르소에게 기댈 수 있었다.

그가 지어내는 몸짓을 따라가다 보면, 말을 않고 지내는 시간도 덜 무서워졌다.

나의 슬픔도 모험 같은 것이라 느끼며, 하여튼 계속 걸었다.

내가 오래 기억하는 하루가 있다.

그즈음 마임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날도 지하 연습실에 있다가 휴식을 취하러 건물 입구로 올라갔다.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아직 말을 돌려받지 못한 때였다.

맞은편 야트막한 담 아래,

누가 한 소쿠리만 쏟아놓은 것처럼 둥그런 볕이 보였다.

이상할 것도 없는 장면이었는데 왠지 눈에 설었다.

볕이란 것을 처음 보는 듯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기로 건너갈 수도 있지 않을까?'

열 걸음도 걷지 않아 맞은편에 도착했다.

세 뼘 정도의 볕 안으로 들어가 앉았더니, 내 몸과 크기가 딱 맞았다.

목덜미와 등으로 온기가 스며들었다.

잠시 후 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지하로 내려가기 전 볕을 또 한 번 멀리서 바라보았다.

어떤 일을 겪고서 아무 일도 없는 듯 살 수는 없어, 그건 거짓된 삶이야,

하지만 이제 볕이 보이네,라고 생각했다.

아니, 거의 중얼거릴 뻔했다.

다시 이전과 같이 나의 미래를 낙관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사랑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도 끝과 죽음을 먼저 고려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늘 속에 몸을 둔 채로 볕을 보는 사람, 내 몫의 볕이 있음을 아는 사람,

볕을 벗어나서도 온기를 믿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깨달았다. 내가 국경에 거의 다다랐다는 것을.

하나의 모험이 끝나가고 있어서,

나는 선 채로 아이처럼 울먹거렸다. (국경을 넘는 일) p.97







이 책을 읽으며 산책, 변화, 이별,

그리고 이야기라는 단어들을 많이 생각했다.

4계절이 있고 계절은 다시 반복되지만

나는 계속 변해가고 여러 이야기와 감정들이 덧입혀진다.

읽으면서 한정원 작가에게 산책은

나와 세상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수집된 것이 많을수록 나의 세계가 풍부해진다는 걸

이 작가의 글이 충분히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랑하는 것을 잃은 사람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그리움과 슬픔이

온 우주보다 큰 마음이라는 걸,

당신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에 만난 모든 소소한 고단함과 아름다움이 합쳐져

충만해지는 마음이 산책과 시가 된다는 걸,

'행복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눈멀고 손가락을 잃은 나병환자 할머니가 불러주던 노래와

그 노래를 듣는 나 사이에 마주 잡은 손 위에 가만히 내려앉는 것이라는

멋진 대답이 있다는 걸 이 책을 보며 알았다.



'걷다가 죽어가는 벌레 곁에 있어주고, 창을 내다보는 개에게 인사하고,

고양이의 코딱지를 파주며 탕진하는 시간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 시간의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또한 자연이나 스치는 타인과도 순간이나마 일치한다.

그 일치에 나의 희망이 있다.

부조리하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그러한 겹침마저 없다면,

매 순간 훼손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견딜까.

방 안에 있을 때 세계는 내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걸을 때 세계는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사물의 표현에 대하여/ 윌러스 스티븐즈)

정말 그것뿐이다.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 그 안의 무한 그리고 무.

나날이 성실한 산책자로 살아가지만,

나는 아직 언덕과 구름을 다 보지 못하고 있다. (언덕 서너 개 구름 한 점)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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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의 한 줄 요약 :

나를 둘러싼 세상을 산책할 때 당신과 풍경과 노래는 시가 되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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