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스웨터(김현) | 제철소
[아무튼 스웨터]는 내가 읽은 아무튼 시리즈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책이다.
그건 아마도 내가 김현 시인님의 시를 좋아하던 독자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스웨터라는 소재가 주는 온기와 따뜻한 계절감도 너무 좋고
김현 시인님 특유의 따뜻한 시선과 아름다운 문장도 정말 좋았기 때문.
"고유한 사람"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른 단어는 '고유한 사람'이다.
이 책은 스웨터의 종류와 스웨터의 서사,
그리고 작가의 눈길이 머물렀던 인물들의 서사를 아름답게 그려낸 산문집이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잘 담아냈다는 점
시인의 문장이라 글이 정말 예쁘고 문장이 너무 아름답다는 점이 참 좋았다.
처음에 리디셀렉트로 다운로드해서 읽다가 몇 장 안 읽고 바로 덮었다.
'아 이건 종이 책으로 소장해야 한다...'
바로 주문해서 종이 책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은 누구나 동경할만한 낭만적이고 세련된 삶을 사는 인물들이 아니라
조금 쓸쓸하고 고단한 인물들, 소외되기 쉬운 인물들에게 시선을 두고
그 삶을 존중하며 아름답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W1ITEsNkFxA
아란 스웨터
이 꼭지에서는 기쁨이 보이지 않고 슬픔이 소리 없이 잠식하는 집에
두꺼운 벽을 뚫고 창문을 내어주는 일을 하는 레아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이 일을 마친 후 옷을 짓는 사람이 된다.
그녀의 스웨터에는 창과 굴뚝, 눈이 있고 고양이를 위한 긴 소매가 있었다.
'레아는 오랜 세월 창문을 내는 일을 했다.
그녀는 창문이 없는 집을 찾아가 창문을 만들어 주는 사람.
한 번은 그녀가 한 눈먼 이의 집을 찾아갔다.
레아는 기쁨이 보이지 않고 슬픔이 소리 없이 잠식하고 있는
그 집의 두꺼운 벽을 뚫고 창문을 내어준 후에
보이는 사람과 함께 창을 열어 새를 날려 보내고 고양이를 얻어왔다.
그 고양이의 원래 이름은 안나였으나 레아는 그 고양이를 히마라고 불렀다.
눈이라는 뜻이었다.
어느 날 레아는 눈의 기쁨을 위해 창문을 내는 일을 멈추고 옷을 짓기 시작했다.
털실과 벽난로가 필요한 일이었다.
훗날, '레아의 스웨터'라고 불리게 되는 레아의 옷에는 창이 있고 굴뚝이 있고 눈이 있고
고양이를 위한 긴 소매가 있었다. 올이 잘 풀리는 것이었다.
가끔 스웨터는 입는 것이 아니라 펼쳐놓고 보는 것만으로도 풍족하다.'(아란 스웨터) p.29
기쁨이 보이지 않고 슬픔이 잠식하는 집에 창문을 만들어주던 여인이
옷을 짓는 사람이 된 후에 그 스웨터 속에 창문과 굴뚝,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내는 이야기.
스웨터를 짓는 일이 마치 고유한 이야기를 그 속에 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글은 나에게 '당신의 고유한 스웨터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나요?'라고 묻는 것처럼 다가왔다.
집업 스웨터
이 챕터는 가을, 제주 여행에서의 사색을 담은 이야기이다.
다방 유리창으로 창밖의 풍경을 보고,
얇은 책을 한 권 읽고 다방의 선곡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작가는 다방에 머무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며 사색에 잠긴다.
다방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간다.
머무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이 계절에 묻어가길 원하는 사람,
떠나고 싶은 사람, 이 계절에 머물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들이 입는 스웨터는 모두 다 다른 계절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여행지에선 사람이 자꾸 보인다.
코끝은 차갑고 목은 따뜻한 옷을 입고 앉아
때때로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가슴께까지 내렸다 하면서
무심히 창밖을 보다가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볼 때, 들켰다는 기분이 든다.
무엇에, 무엇을 들킨 걸까.
세 사람이 다방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다방은 다시 적막해지지 않는다.
사람이 머물다 사라진 곳은 아주 잠시일지언정 온기가 머무는 법.
이 섬에서, 이 섬의 외진 곳에서 다방을 열고 닫으며
하루를 보내는 이가 견디는 시간은 어떤 온도를 가지고 있는 걸까.
집업 스웨터의 지퍼를 끝까지 올려 채웠다.
다방으로 새로운 여행객이 들어선다.
칼하트 모자에 청남방, 군청색 카디건 스웨터에 생지 데님,
반스 운동화, 큼지막한 배낭.
한눈에 보아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이다.
동쪽은 거칠고 서쪽은 부드럽다.
동쪽은 달리고 서쪽은 걷는다.
동쪽은 날뛰고 서쪽은 차분하다.
여행의 방향을 정하는 일은 사람의 심성을 드러내기도 하는 법.
그뿐인가. 기온에 맞춰 스스로 골라 입는 스웨터 한 벌이
나는 어떻게 계절을 사는 사람인가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계절에 드러나기를 원하는 사람, 이 계절에 묻어가길 원하는 사람.
이 계절에 떠나고 싶은 사람, 이 계절에 머물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들이 입는 스웨터는 모두 다 다른 계절적 감각을 가졌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면 누구나 스웨터 생각이 난다.
스웨터의 계절이다.
섬과 다방과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과 계속해서 그곳에서 여행객을 기다리는 사람.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나 같이 섬을 일주하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대화.
"깊죠?"
"깊네요."
두 사람이 보온을 위해 챙겨 입은 옷,
여행지에서는 사연을 만들 만한 옷을 한 벌씩 꼭 챙길 것.
그런 옷으로 스웨터만 한 것이 없다. (집업 스웨터) p.44
'글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바깥의 풍경과 공기를 읽고,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귀 기울이고,
읽는 사람을 그 장면 속으로 선명하게 초대할 수 있는 글.'
'여행지에서는 사연을 만들만한 옷을 한 벌씩 챙겨가야지.'
그런 옷으로 스웨터만 한 게 없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의 특별한 스웨터를 챙겨가야겠다.
라플란드 스웨터
'편지를 쓰는 일은 마음보다 몸을 먼저 움직이는 일'
라플란드 스웨터를 생각하면 자연히 편지나 우체국을 생각하는 작가.
그 이유는 장이지 시인의 시집 [라플란드 우체국] 때문이다.
핀란드 북부 라플란드에는 산타우체국이 있다고 한다.
작가는 장이지 시인이 라플란드 산타 우체국의 서사를 아는 사람일 거라 짐작한다.
세계 각지의 어린이들이 라플란드의 산타에게 편지를 보내온다.
작가는 '산타가 있다고 믿고 그곳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일이란
어쩌면 정확히 스웨터를 설명하는 일일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를 향하는 마음' 같은 것이다.
'처음 스웨터를 주제로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스웨터를 직접 짜보자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품었더랬다.
뜨개질 관련 책자를 찾아보았고,
털실과 바늘의 종류, 뜨개 기술에 대해서도 검색했다.
생각처럼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쉽게 포기했다. 그리고 깨우쳤다.
'아, 스웨터를 짜는 것은 편지를 쓰는 일과 같구나.'
스웨터를 짜려고 하는 이가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털실도 바늘도 아니고 익혀야 할 것은 뜨개 기술도 아니었다.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누구'였다.
누구를 위하여 뜰 것인가. 받는 이를 만드는 것.
그것이 뜨개질의, 스웨터의 처음이자 끝이었다.
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짝사랑하는 이를 위해
뜨개질로 목도리나 스웨터를 떠주는 설정을 넣는 일은
그야말로 '내가 당신을 생각한 시간을 보냅니다.
당신도 나를 생각해 주실까요?'라는 메시지를
정직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라플란드 스웨터) p.77
작가는 스웨터를 짜는 것은 편지를 쓰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뜨개질 앞에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털실이나 바느질, 익혀야 할 기술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뜰 것인가'이다.
누구를 위하여 뜰 것인지, 받는 이가 필요한 것이다.
레아의 스웨터
이 책에서 제일 좋아했던 꼭지는 마지막 챕터인 레아의 스웨터이다.
이 챕터의 중요한 인물이 네 명 등장한다.
죽어가는 늙은 개 아니의 죽음을 준비하는 비비안나.
그녀는 아들을 사고로 잃고 홀로 살며 아니라는 개를 키운다.
이 아니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아니에게 마지막으로 입혀 보낼 스웨터를 레아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레아는 싱글맘이다.
그녀는 원래 집을 수리하고 청소하는 일을 하던 여인이었다.
레아의 손길이 닿으면 슬픔이 있는 집도
바람과 빛이 드는 아름다운 집이 된다.
그런 레아를 '슬픔을 닦는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 김현 시인은 바로 이런 표현을 쓰는 거다.)
언급하진 않지만 이 레아는 앞에 소개한
아란 스웨터 이야기 속의 창문을 만들고 스웨터를 짓던 여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리고 비비안나의 개 아니를 진찰하는 동물병원 의사 윤과
그의 연인 레이가 나온다.
이 두 사람은 각각 사별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윤에게는 훈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훈은
윤의 연인인 레이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 이 책에 소개된다.
훈은 레이와 산책을 갈 때 레이의 손을 잡아주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한다.
훈의 손은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훈은 조금 특별한 아이여서 버려진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손에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어린 시절 훈은 자신의 손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자신을 두 번 다시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그런 훈이 레이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SF 적인 요소가 있다.
훈은 지구인이 아니기에 언젠가는 윤과 레이를 떠나야 한다.
하지만 윤과 레이가 진심과 성실함,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받아들였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훈은 가고 레이와 윤도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비비안나 역시 늙은 게 아니와 작별한다.
그리고 이 챕터의 마지막은 이 시절을 추억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슬픈 시절과 이별이 삶을 할퀴고 가지만
주고받은 마음의 온기는 따뜻하게 남아있는 문장이었다.
이 챕터 속에서 스웨터의 역할은 마음과 정성,
그리고 시간과 추억이 깃들어 있는 따뜻한 장치로 사용된다.
'윤은 누군가의 인생 영화와 인생 책과 인생 음반이
가지런히 놓인 좌판을 지나쳐 오며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던 한 사람을 기억해 냈다.
비비안나. 개의 주인.
비비안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비비안나가 제정신이 아닌 때가 더 많았다고 수군댔지만,
윤은 비비안나가 그녀의 개를 끌어안고 창밖을 바라보며 들려주었던
그 짧은 인생 이야기를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인생을 믿지 못한다면
어떤 인생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쁨은 두 여인이 한 밤의 침대 위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잠이 드는 곳에 있기도 한 것이다.
슬픔이 그녀들의 발아래 잠들어 있을지언정.
멀리서 누군가 윤을 불렀다.
윤이 뒤를 돌아보자 어딘가 낯이 익고
그러나 이제는 낯선 이가 된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입은 에메랄드빛 스웨터가
겨울의 볕을 받아 녹색 광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윤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몇 개의 은빛 동전을 손에 쥐었다.
윤은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녀의 작은 개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자두 따위를 지키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털실을 쓰겠노라고.
에메랄드빛 스웨터를 입은 이가 곁으로 오자
윤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 새빨간 자두 한 알을 그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레이? 슬픔 때문에 온 분인가요?
윤? 메리 크리스마스.
두 사람은 함께 사별한 이들을 위한
말하기 모임 장소로 갔다. 시작했다.
마침내 윤은 한 마켓에 걸린
빈티지 스웨터 한 벌을 사기 위해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에메랄드빛 스웨터였다.
옷소매 한쪽에 붉은 실로 두 마리 새가,
다른 한쪽에는 노란 실로 레아라는 서명이 작게 수놓아져 있었다.
윤은 스웨터를 입고 선 레이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지금쯤이라면 레이에게 연락을 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윤은 생각했다.
지난밤, 어둠 속에서, 이야기 속에서,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은 진실하고 성실했다.
윤은 스웨터를 집어 들어 값을 치르고
작은 창이 있는 작은 집으로 향했다.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일련번호가 L로 시작할 게 분명한 작은 시리우스가
눈을 털어내기 위해 몸을 한 번 흔든 후에 백발이 된 윤의 뒤를 따라갔다.
(레아의 스웨터) p.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