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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일상도 아름다운 풍경이 되는 시간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by 해나책장

박수근 : 봄을 기다리는 나목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021. 11. 11 - 2021. 03. 01



https://www.youtube.com/watch?v=3wMqsrrLWqk

'풍경'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심재휘 시인의 '풍경이 되고 싶다'라는 시를 아주 좋아하는데 시를 읽을 때면 한 사람의 인생을 바라보는 풍경이 그 세월의 증인이 되어주는 것만 같았다.


참혹한 일제 강점기를 지나 곤궁한 생활을 이어가던 1950-60년대에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풍경을 그리는 화가가 한 명 있었다.

그는 12세에 밀레의 <만종>을 보고 밀레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만종은 가난한 농부 부부가 기도하고 있는 따뜻하고 슬픈 그림이다.

이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은 12살 소년 박수근은 무럭무럭 자라 정말 밀레처럼 훌륭한 화가가 된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익혀 꾸준히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한다.

그의 그림 속에는 창신동의 가난한 이웃들, 가족, 시장의 상인 등 그가 날마다 마주친 풍경과 사람들이 있다.

전쟁을 통과하고 곤궁한 생활 속에서 가족을 부양하며,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온갖 수모를 견디며 PX에서 그림을 그려야 했던 사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나는 전시회를 가기 전 작가의 콘텍스트를 많이 찾아보고 정리하는 편인데, 박수근의 일생을 알 수록 기구하고 마음이 아파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전시회에 갔었다.

어떤 서사를 알고 나면 작품에서 읽히는 것들이 있어서 내가 울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가난하고 힘든 계절을 지나왔다고 불행한 삶은 아니다.

그는 선한 사람, 진실한 사람, 끝이 보이지 않는 역경 앞에 자신을 망가트리기엔 너무나 예술과 인생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

그의 그림은 선하고 따뜻하고 단단하다.

그의 시선이 담아낸 풍경은 미지의 세계도 아니요, 현실을 외면한 도피도 아니요, 불안한 내면의 표현도 아니요, 자신을 둘러싼 가족과 사람과 일상의 풍경이었다.

단순하고 진실된 그의 그림 앞에서 깊은 고독과 뚝심이 느껴졌다.

그의 그림은 말하고 있었다. 그는 불행하지 않았다고.

이런 인생도 있구나. 나는 되려 마음이 강해지고 단단해진 눈빛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전시 제목 '나목'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매운 계절을 견뎌내며 곤궁한 생활을 이어나간 사람들과 그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고 자신의 예술을 꽃피운 박수근을 상징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전후의 한국 사회, 서울 풍경, 사람들의 일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박수근을 모델로 그려낸 소설이다. 전시회 가기 전부터 조금씩 읽었는데 자료조사나 상상이 아닌 실제로 전쟁을 겪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이번 전시의 특징은 시선이다.

전시는 4부로 구성된다.


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

2부 미군과 전람회

3부 창신동 사람들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


각 전시실은 박수근의 부인 김복순 여사, 소설가 박완서, 아들 박성남, 그리고 일찍이 박수근의 진가를 알아본 컬렉터와 비평가의 시선을 따라 구성된다.

4개의 전시를 관통하는 박수근이 담아낸 그림 속 시선,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시선 속에 공통된 것은 아름다움과 존중이다.

그림을 그린 박수근도, 그를 지켜보던 이들의 시선 속의 박수근도 선하고, 성실하고, 따뜻하고, 경이롭다.


전시는 그렇게 서로가 주고받은 풍경의 증인이 된다.

'언젠가 이 집을 떠날 때 한 가지만 가지고 가라 하면 나는 북쪽 창밖의 풍경을 데리고 가겠다.'

심재휘 시인의 시처럼 나의 겨울을 여는 풍경으로 나는 박수근을 가지고 돌아온다.


그의 그림에는 귀로가 많다.

그가 그린 여인의 모습은 대부분 아내이고, 박완서 선생님 작품 속에서 그의 아내는 목이 길고 단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된다.

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에겐 따뜻한 가정이 있었고 아름답고 고요한 아내가 있었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예술을 향한 진실된 사랑과 성실한 태도가 있었다.

혹독한 계절을 관통하는 풍경 치고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그의 귀로를 보고 돌아오며 예감했다.

이 풍경은 나에게 깊은 흔적을 남기겠구나.

나는 이제 조금 덜 울고,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라면 덕수궁관으로 가자.

조금 더 따뜻하고 다정하게 이 추운 겨울을 지나갈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렇게 51해를 살아낸 아름다운 화가를 알고 있다.


전시는 3월 1일까지.


#해나의전시회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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