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나의 책장을 덮으며
"잘 쓴 남의 글은 늘 열광하고 좋아했지 질투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시선과 글은 질투날만큼 부럽다."라는 글을 이 책과 함께 피드에 올린 적이 있다.
수많은 분들이 피드를 저장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반년이 지나 '2021년 올해의 책'을 정리하며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여전히 뭉클하고 질투날만큼 부러운 글.
그리고 나에겐 아주 고맙고 소중한 책이다.
60년대 젊은 영화인이었던 베르너 헤어초크에게 평론가 로테 아이스너는 은인 같은 존재였다.
낡은 영화의 죽음을 고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뉴저먼 시네마라고 불리게 되는 독일 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호기롭게 시작한 걸음이지만 이 신세대 영화인들이 인정받는 데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다.
대내외적으로 평론의 역할이 정말 중요한 시대였고 그때 신세대 영화인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힘 있는 평론가가 바로 로테 아이스너였다.
그런 그녀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베르너 헤어초크는 뮌헨에서 파리까지 걸어갈 결심을 한다.
1974년 11월의 일이다.
11월 23일에 출발하여 12월 14일에 파리에 도착하기까지 22일의 여정을 기록한다.
삶과 죽음, 현실과 몽상이 뒤섞여 있는 어지럽고 묘한 구성.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책을 만나면 그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는 정신적으로 내가 많이 성장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강렬한 염원 하나로 800킬로미터가 넘는 눈보라 속을 걸어가는 마음, 그 마음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이야기의 힘.
그렇게 고통스러운 길을 가면서도 너무나 풍부하게 담아내는 내면의 생각들.
영화감독으로서의 경험이 만든 아우라가 빛을 발하는 책이다.
그리고 눈물 나게 좋았던 마지막 페이지.
"그러자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아주 섬세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혼자 걸어왔고 보호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이해하는 듯했다.
미묘하고 짧은 순간, 뭔가 부드러운 느낌이 죽도록 지친 나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창문을 열어주세요, 며칠 전부터 저는 날 수 있게 되었답니다. p.139"
22일의 걸음이 베르너 헤어초크에게 날개를 달아준 걸까?
2021년은 나에게 혼자 긴 어두움을 통과하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많이도 울었다.
책을 읽는 동안 베르너 헤어초크가 걷는 길을 내가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춥고, 어둡고, 내일이 막막하고, 무섭고 외롭고 생존 지향적인.
그가 22일의 여정을 무사히 마쳤을 때 나 역시 나의 세계가 크게 확장된 성장을 경험했다.
그의 걸음을 따라가며 나의 무거운 걸음을 마저 통과해낸 기분이 들었다.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은 정성을 통해 어떤 염원을 담아내거나, 무모해 보이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것 같은 순간이 우리에겐 분명히 있다.
그런 어두운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분들께 이 책을 꼭 추천하고 싶다.
읽는 동안 나의 마음이 많이 강해졌다.
책을 읽으며 나를 많이 자라게 했던 너무 소중한 책이다.
언제 다시 이런 역작을 만나게 될는지.
고된 여정 뒤에 기다리는 환희의 책.
https://www.youtube.com/watch?v=s4Ic1xozQW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