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안톤 체호프 바냐 아저씨, 무라카미 하루키 드라이브 마이카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편들>의 첫 번째 단편인 <드라이브 마이카>가 원작이다. 하루키는 비틀즈의 <드라이브 마이카>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이 책은 제74회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고 황금 종려상 경쟁 후보작에 올랐다.
나는 올해의 첫 영화로 이 영화를 봤다. 거의 3시간의 러닝타임이 있었음에도 너무 좋았다.
올해 첫 영화였는데 올해의 영화가 되어버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0V1vAiUn86w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감독과 공동 각본을 맡은 영화이다.
2021년에 개봉한 일본 영화이다.
이 영화는 아내를 갑자기 여윈 중년의 남성, 연극연출가 가후쿠가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를 연출해 무대에 올리는 과정을 담는다. 이 연극의 주최 측인 연극제에서 젊은 여성 운전기사 미사키를 배정해주고 그녀가 가후쿠의 어두운 시간에 본의 아니게 동행하게 된다.
운전기사로 고용된 미사키는 어머니로부터 지속적인 학대를 당하며 자라다가 산사태로 인해 집이 무너져 홀로 살아남는다.
원작 소설에서는 어머니가 음주 운전을 하다 사고가 나서 튕겨나가며 죽음을 당하게 되는 걸로 나온다.
미사키는 어머니에 대한 애증과 불확실한 미래 속에 혼자 남겨져 사람들을 곁에 두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고독한 인물이다.
주인공 가후쿠에게도 세 개의 큰 상처가 있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것, 어린 딸이 죽은 것, 그리고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에 대해 '왜'라고 물어보지 못했다.
영화에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연극 <바냐 아저씨> 대본 리딩 장면과 가후쿠가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대본 연습을 하는 차를 미사키가 운전하는 장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후쿠는 아내가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거기에 맞추어 대사를 읊조린다.
바로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의 대사들이다.
가후쿠는 연출가이면서도 주인공 바냐의 역할로 무대에 섰다. 하지만 아내가 죽은 후 그는 이 역할을 다시 하지 못하게 된다. 연극 <바냐 아저씨> 속의 바냐는 가정이 있는 아름다운 여인 소냐를 사랑하고 있다. 그로 인해 깊게 고뇌하고 전달되지 않는 마음에 괴로워하는 역할이다. 가후쿠에게 이 연극은 계속해서 아내의 외도를 생각나게 하는 괴로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영화에선 아내가 한 번의 외도를 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배우였던 아내는 작품을 할 때마다 남자 주연배우와 잠자리를 한다. 가후쿠는 그걸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하게 되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원작을 읽다 보면 '아내는 그냥 그런 사람인 것인데...'라는 생각이 찜찜하게 계속 따라온다. 아무튼 가후쿠 입장에선 이걸 이해하고 싶었던 것인데 여기서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가후쿠는 자신의 세계와 가정, 지금의 아내에게 충실한 유형의 사람인 것이다.
영화에서 가후쿠가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는 장면에서도 이런 깊이가 드러난다.
그는 극 중 대사가 가진 본질적인 힘에 깊이 스며들기 위해 배우들에게 꽤 오래 대본 리딩을 시킨다.
아무런 감정을 넣지 말고 기계처럼 대사를 반복해서 읽는 동안 배우들의 내면이 깨어나고 극 중 역할에 깊이 다가가게 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원칙에 충실하고, 기본을 소중히 여기고, 신뢰와 도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후쿠에게 아내의 외도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가후쿠는 아내를 정말 사랑하고, 아내의 외도의 이유를 이해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내와 직접 이 이야기를 나눌 용기가 없다. 지금까지 지켜 온 일상과 아내와의 관계가 깨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알기를 원한다.
하루키의 원작에선 그런 말을 한다.
"아는 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강해질 수 있으니까". p.29
끝까지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자 삶의 자세였다.
설령 아무리 극심한 고통이 닥친다 해도 나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강해질 수 있으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드라이브 마이카) p.29
가후쿠의 차를 운전하는 미사키는 <바냐 아저씨>의 소냐를 닮았다. 극 중 소냐가 좋아했던 아스트로프라는 의사는 소냐의 새엄마 엘레나를 좋아한다. 바냐 아저씨가 사랑했던 여인도 바로 이 아름다운 여인, 엘레나이다. 소냐가 자신의 외모가 조금 더 예뻤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대사를 읊조리는 장면이 나온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미사키는 가후쿠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네가 좀 귀엽고 예뻤으면 네 아빠가 집을 나가지 않았을 거라고, 엄마는 늘 그렇게 말했어요.
제가 못생기게 태어나서 버리고 갔다고요." p.35
엄마에게 어떤 학대를 받았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아내에게 외도의 이유를 묻지 못한 채 아내의 죽음을 맞이한 가후쿠, 어머니의 학대 속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채 홀로 살아가고 있는 미사키.
이 두 사람의 상처는 치유될 수 있을까?
가후쿠와 미사키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리고 연극을 준비하는 배우들이 대본을 읽는 동안 영화 속에서는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의 대사가 계속해서 흘러간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원작의 내용과 메시지가 궁금해진다.
바냐 아저씨는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가 1899년에 출판한 희비극이다.
주인공 바냐 아저씨는 예술과 학문의 세계를 동경하지만 차마 그곳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숲 속에 들어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이다. 그는 예술 대학의 교수로 있는 매형 세레브라코프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매형이 언젠가 역사에 남을 위대한 책을 출간하길 기대한다. 하지만 매형은 그가 기대했던 훌륭한 인격이 아니었고 세속적이고 여자를 밝히는 속물이었다.
매형 세레브라코프에 대한 실망과 환멸, 그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데 젊은 시절을 바쳤던 자신의 노력이 보상받지 못한데 대한 억울함, 그리고 매형의 아내 엘레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마음의 고통까지.
바냐 아저씨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초라한 마음과 삶의 고단함, 짝사랑으로 인한 괴로움으로 너무나 고뇌한다. 그리고 매형이 자신의 조카 소냐의 소유인 이 숲을 팔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분노한다. 그는 총을 꺼내 들고 매형을 죽이려고 하지만 이 또한 실패하고 만다.
결국 매형과 아내 엘레나는 도시로 다시 돌아가고 숲에 남은 바냐 아저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펑펑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이 작품 속에서 바냐 아저씨처럼 보상받지 못하는 헌신과 짝사랑을 했던 소냐가 가만히 바냐 아저씨를 위로하며 말한다. 이 대사가 <드라이브 마이카>라는 영화와 소설을 내내 관통하고 있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 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안톤 체호프 <바냐 아저씨 중>
"싫더라도 원래로 되돌아와.
하지만 돌아왔을 때는 그전과 조금 위치가 달라져 있지. 그게 룰이야.
그전과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어." p.38
하루키의 원작 소설에서 가후쿠는 "연기는 다른 인격이 되었다가 돌아오는 일"이라고 말한다.
드라이브에도 공통점이 있었다.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 있다. 하지만 어떤 길을 떠날 때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그게 여행이고, 드라이브인 것 같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각자의 상처를 이겨내고 돌아오는 길을 이 영화와 책은 각각 어떻게 소개하고 있을까?
이 차이점은 영화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남겨두고 싶다.
가후쿠는 답을 알기를 원했다.
아내는 나와의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걸까?
그랬다면 왜 만족하지 못했을까?
아내는 왜 외도를 했을까?
그 사람의 어떤 면을 사랑하게 된 걸까?
해결되지 않는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문제 속에서 어려웠던 경험들이 각자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답을 알고 싶어 한다. 답을 알게 되면 고통을 매듭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힘드니까.
하지만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상처를 충분히 애도하고 빠져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슬픔의 흔적을 한 구석에 간직한 채 살아가는 거다.
나도 그런 고통스러운 일들과 슬픔을 애도하며 한 가지 알게 된 건 슬픔의 흔적이 어느 날 문득 울음처럼 몰려올 때도 그것에 반응하는 내 캐릭터가 많이 바뀌어 있다는 거였다.
충분히 애도한 슬픔은 회복탄력성을 가진다. 그래서 슬픔을 회피하지 않고, 충실하게 통과해내야 한다.
이 과정을 잘 소개하는 책이 한 권 있다. 김형경 선생님의 [좋은 이별].
책
책의 장점은 여백이다. 하루키 특유의 간결함과 건조함이 소설을 끌고 가기 때문에 여백이 많다. 그만큼 읽는 동안 질문이 생기고, 인물들이 직관적으로 해답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느낌으로 서사를 채워갈 수 있다. 하루키는 담백하면서도 냉소적으로 그 여백을 잘 구성해 간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영화
영화는 러닝 타임이 거의 3시간이다. 푹신한 쿠션 같은 걸 들고 들어가시길...
영화 속에서는 꽤나 많은 시간을 <바냐 아저씨> 대사를 읽는 데 사용한다. 이 대사의 메시지가 너무 중요하다.
테이프에 녹음된 아내 오토의 목소리로 울릴 때 대사들은 아직 영혼을 가지지 못한다. 가후쿠가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따뜻하고 깊이 있는 연출을 통해 이 대사들은 계속해서 의미를 가지고 시간 속에 스며들게 된다. 주인공 가후쿠와 운전기사 미사키가 차를 타고 오가는 동안에 그들의 숨겨진 서사가 드러날수록 이 대사들은 색채를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의 내면이 변하고 일어났을 때 큰 울림으로 두 주인공과 관객들의 마음에 스며든다. 이 기나긴 과정을 위해 류스케 감독은 3시간을 사용했다.
영화에서는 원작에 없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소냐 역의 유나, 그리고 연극제의 관계자 진대연. 이 두 사람은 극 중 부부이다. 원작과 다르게 영화에서 가후쿠는 다양한 언어를 섞어서 한 무대에 올리는 연출을 진행한다.
한국, 중국, 일본인 배우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대사를 하고 스크린에 자막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연극을 올린다. <바냐 아저씨>의 중요한 배역인 소냐 역할을 한국 배우 이유나가 맡게 된다. 이 역할은 신인 배우 박유림 님이 맡았다. 이 소냐 역할을 맡은 이유나는 수어를 사용하여 연기를 하는 장애인이다. 소냐의 중요한 대사가 수어로 연기되는데 너무 뭉클하고 아름다웠다. 이게 직접 육성으로 대사를 뱉는 것보다 훨씬 뭉클하고 강하게 감동이 전해져 온다.
안톤 체호프 <바냐 아저씨>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는 이 영화의 뿌리 같은 역할을 한다. 영화 내내 아파하고 있는 주인공들에게 슬픔을 털어내고, 그럼에도 살아가자고 다짐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드라이브 마이카>는 상대방에게 미처 해결하지 못한 슬픔, 다하지 못한 말을 가진 가후쿠와 미사키가 슬픔을 털어내고, 그럼에도 살아가자고 다짐하는 회복의 여정이다. 연극을 마치고 돌아올 때, 드라이브를 마치고 돌아올 때 이전과 조금은 달라져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처럼, 영화를 마치고 나오는 나 역시 조금은 달라져 있는 기분이었다.
해나의 한 줄 요약 :
<드라이브 마이카>는 슬픔을 털어내고, 그럼에도 살아가자고 다짐하는 회복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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