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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책장 Aug 04. 2022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을 덮으며

해나의 책장을 덮으며




현실이 마음과 이상을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시간을 견디는 일'이다.

그리고 시간을 건강하게 견디게 해주는 최선의 방법은 '산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경기도로 이사를 왔는데, 이전까지 나는 송파구 문정동에서 5년을 살았다.

그곳에서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건너가는 동안 자주 걷고, 자주 노래를 불렀다.

마음보다 현실의 속도가 너무 느렸던 시기에 나의 기도와 노래는 동네 산책길, 자박자박 걷는 발걸음 속에 녹아들었다.

그 시절 산책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가장 위안을 준 일상이었다.

나는 도시의 산책자가 되어 고된 시간을 이겨내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가장 아름답고 여유로웠다.

시간을 견딜 때도, 마음에 드는 사람과 더 친밀해지는 순간에도 산책은 나를 알게 하고, 서로를 알게 하고, 그 시절을 읽어갈 지도를 만들어준다.


정지돈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은 산책을 주제로 한 에세이이다.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자유롭게 풀어낸 도시 산책자의 사색을 담아낸다. 

산책, 공간, 장소라는 개념 안에 문학, 젠더 문제, 인종차별, 자본주의 등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정지돈 작가의 문학적인 스펙트럼과 위트가 좋아 책이 출간되면 꼭 챙겨보는 편인데 이 책은 웃겨도 너무 웃기고 기발해도 너무 기발했다.

일독을 마치고 이독을 할 땐 필사를 하는데, 필사하며 소주제 제목이 죄다 유머 1 ㅋㅋㅋㅋㅋ, 유머 2 ㅋㅋㅋㅋㅋ, 유머 3 ㅋㅋㅋㅋㅋ 이런 식이었지 뭐야. (이 책은 유머집이 아니다)


그의 책 속에서 산책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산책 자체가 의미가 되어 목적과 정체성을 잃고 헤매며 진정으로 쾌활해지기도 하고(이것은 글쓰기와 공통점이다), 영감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장소가 의미를 가질 때 그곳에 마음을 붙이고 자신의 장소로 마음을 내어주기도 한다.

이 세 가지는 내가 문정동에 살 때 도시 산책자로서 정체성을 입어가던 과정이기도 하다.


새로운 도시로 이사 와서도 나의 산책은 이어진다.

동네의 산책로와 도서관 가는 길이 마음에 들어 단박에 동네를 좋아하게 된 나는, 이곳에서도 중독처럼 아침, 저녁을 걷는다.

자주 걷고, 노래를 부르고, 목적 없이 헤맨다.

복잡한 날에는 복잡한 대로, 정제된 날에는 고요한 대로 여전히 '걷는 일상'은 지속되고 나의 시절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거면 충분한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시절에도 산책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최선의 일일 터이니 우선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젠 마스크 벗고 걸을 수 있다구~


https://www.youtube.com/watch?v=dr3THS8SL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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