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정지우)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 2:10-13)
아가서에는 사랑하는 이를 향해 말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다"라고 말한다. 그건 사랑하는 이가 봄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겨울을 지나도, 사랑하는 이들은 봄의 온기로 눈보라를 통과해 낼 수 있다.
인생의 가장 척박한 시간을 지날 때 나를 위해 기도하고 응원해 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 사람이 나보다 나를 더 많이 생각해 준다는 것만으로 용기가 난다. 사랑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꾸고, 사랑하는 이의 시선으로 세상과 나를 보게 한다.
그렇게 우리의 경계는 확장되고 우리는 성장한다.
그러다 어느 날, 어제까지 나의 전부였던 한 세상이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사랑이 끝난 것이다.
사랑이 끝났을 때, 나는 이승우 작가님의 <사랑의 생애>를 읽고 있었다.
사랑이 내 속에 들어오면 나는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랑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 그 사랑의 역할이라는 걸 아프게 이해하고 있었다.
내 속에 들어와 나를 성장시키고 시간이 다하면 떠나가는 것이 어떤 사랑의 생애이기도 하다고.
사랑을 정의하고, 나의 사랑의 가치관과 나에게 믿음과 신뢰란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
나에게 모험이란 무엇일까? 사랑이 내게 상처가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평소에 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나의 사랑을 정의해 보고 사유할 수 있다면 그건 우리의 사랑을 풍부하게 하는 경험이 될 거다.
사랑을 '굳이' 정의하는 이유는 '잘 사랑하기 위해서'다. 사랑은 자주,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기에 내 삶에 사랑이 찾아왔을 때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지혜롭고 솔직하게' '잘' 사랑해야 한다.
정지우 작가의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는 이 사랑의 빛깔을 감정, 관계, 이별, 믿음이라는 네 개의 테마로 잘 갈무리한 책이다.
앞서 말한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와 함께 읽어보길 추천하고 싶다.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정지우), 포르체, 2023
정지우 작가의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는 인문학적 발췌들을 기반으로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조명하는 책이다.
1장_사랑을 사랑하는 이유, 감정
2장_당신이라는 세계를 향해, 관계
3장_사랑에 실패하더라도, 이별
4장_사랑의 이해, 믿음
5장_그 어떤 순간에도, 사랑
각 챕터마다 다양한 인문학자들의 잠언이 발췌되고, 이를 바탕으로 정지우 작가가 생각하는 사랑을 꿰어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새로운 안경을 가지는 것과 같다. 사랑이 시작되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비친 반영에 의해 나의 정체성이 새롭게 형성되기도 한다.
"사랑은 내 안의 기준이나 자아만 바꾸지 않는다. 사랑은 내가 존재하는 세계, 내가 경험하는 '세계 그 자체'를 바꾼다. 그 세계는 사랑 이전에는 없던, 경험할 수 없던 세계이다." p.46
사랑의 감정은 건축과도 같아서 우리 안에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사랑은 성숙의 과정이며 성장의 과정이다. 나의 입장을 넘어 그 사람의 입장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게 되니까.
심리학에서 '조율'은 부모와 아이 간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조율을 통해 얻는 사랑의 존재는 평생 아이를 지지해 주는 마음의 힘이 된다. 아이는 누군가로부터 보호받은 채, 안전을 보장해 줄 무언가를 지니고 있거나 내면의 힘으로 가득 찼다고 믿을 때 모험을 한다. 이런 경험이 쌓이는 것은 아이의 자신감의 근원이 된다.
사랑도 이와 같은 '조율'의 상호작용이라 사랑의 존재가 있다는 것으로 우리는 모험을 하고 새로운 세상을 돌파해 나갈 용기를 가지게 된다.
사랑의 대상을 생각하는 사람, 사랑받고 있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의 시야는 그렇게 넓어지고 풍성해진다. 이 과정들을 정지우 작가는 다채로운 인문학 문장들을 통해 잘 꿰어낸다. 무엇보다 사랑을 바라보는 그의 바탕이 깊고 명로 하다.
그러나 사랑에는 다른 빛깔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바로 이별이다.
이별은 서서히 오기도 하고, 한 순간에 사고처럼 맞이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타인과의 분리에 취약하기에 그 순간 지독한 외로움을 경험한다. 이 과정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성장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사랑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이별의 과정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서만 깊어지고 풍부해지는 성장통이기 때문이다. 이별을 경험하고 잘 매듭지어 본 사람은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도 민감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별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서로의 차이를 끌어안을 의지가 있는 동안에만 이어진다.
그래서 작가는 '사랑에 최선을 다하되 사랑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아픔에 대비할 수 있을까? 이별은 실전이기에 극한 외로움과 상실을 감당해내야 한다.
이 책은 감정 > 관계 > 이별 > 믿음을 지나 결국 '사랑'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사랑의 계절을 충실히 통과하며 사랑 안에서 자라 간다. 사랑을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 중 하나라고 느끼는 것은 이 충만감 때문이다.
"사랑이 넘쳐난다고 느낄 때, 우리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갖는다. 그리고 실제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해내고 만다. 이전까지 상상만 했던 먼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그전가지 망설이기만 했던 일들을 순식간에 해내기도 한다.
한 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지 못한 일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응원에 힘입어 성공해 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 달려가기도 한다. 그 모든 일은 정말이지, 사랑이 하는 일이다. 사랑은 우리 마음에 생명을 불어넣고 삶에서 이전에 없던 궤적을 그려내게 한다.
사랑이 일단 마음에 들어오면 자기 자신도, 타인도, 세상도, 이 삶도 한결 더 넘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사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이전에 상상도 못 했던 대단한 무언가를 우리가 성취하게 하는 힘을 준다." p.145
작가는 '어떤 선택에 몰입해 헌신할 때 우리가 얻는 것은 깊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내 선택의 깊이를 알아가는 것이 진짜 행복'p.196이라고.
사랑이 주는 깊이를 알아가고, 그 안에서 익어가는 것. 사랑이 나를 통과해 가는 동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것.
나는 아가서의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다'는 구절이 늘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봄을 가져온다는 그 말에 기대어 추운 계절과 막막한 어둠을 용감하게 돌파해 왔다.
사랑을 믿고, 이별에 진심으로 무너지고, 다시 신뢰와 믿음을 쌓아 새로운 사랑을 기대하며 자라 가는 내가 좋았다. 내가 믿는 사랑이 좋았고, 사랑을 신뢰하는 나를 믿었다.
사랑의 감정이 옅어지고 있는 시대에도 '사랑의 생애와 계절'은 여전히 흘러가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세계를 건축한다.
봄이 왔다. '내 선택의 깊이를 알아가는 진짜 행복'이 당신의 삶에도 깃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