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나레기병

어쩌다 보니 프레젠터 5

by Dolphin knows

일주일 전에 그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이사님께 전화를 받았다.

그분은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셜록홈스 레고 피겨를 선물로 주셨던 두 아이의 아빠셨다.


"뫄뫄 팀장은 참 열심히 일했는데 너무 자기를 몰아친 것 같았어요. 대부분을 자기탓으로 돌리고요.

왜그래요. 무리하지 마요. 그러니까 아프죠."


고마웠다. 대표님도 자주 하셨던 말씀인데 그땐 잘 안 들렸다. 내가 뭐만 더 잘하면,

모 클라이언트의 저런 억지스러운 요구와 트집 자체가 안 나오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 회사를 떠난 뒤에도 이사님과 대표님과는 자주 연락도 하고 가끔 일도 의뢰받고 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내가 세상 쓸모없게 느꼈는지...


큰 기업에 있었을 때는 부서별로 일이 세분화되어 있었고, BTOB기업이 아닌 BTOC기업이라 만나는 사람들은 주로 부서 안의 사람들 혹은 협력해야 할 타 부서 상사였다. 그러나 거기서 나와서 작은 대행사로 옮겼을 때, 특히 이 PT작업 같은 경우는 상사가 아닌 고객과 직접 마주해야 한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다. 그리고 참 잔인하고 험하기도 하다.

그 참을성 많고 호인인 대표님까지도 한 기업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대표실에 들어가서 숨소리도 안 내고

가만히 화를 식히신 적도 있었다. 그 워딩을 기억한다.

'이 일로 돈 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 회사랑 일하는 것도 큰 기회니... 이 이름값으로 일해서 돈 벌어라'

이게 말인지 방귄지.

때로는 추석 내내 나와서 일을 하고, 그냥 기를 죽이기 위해 트집을 잡는 경우도 부지기수로 많았다.

잘해야 본전, 못하면 무조건 박살이 나고(못하기도 힘든데). 그리고 그 일은 기준이 뒤죽박죽 했다. 실무자가 시키는 대로 새롭게 만들어서 실무자에선 좋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 부서의 회의에 내가 만든 자료를 가지고 동참시키더니 대표가 까니까. 갑자기 뒤로 빠져서는 다 내가 잘못한 양 몰아갔다.

어쨌든 일이 잘 끝나 밥을 사줬는데 그분들은 고맙단 말도 미안하단 말도 안 하더라. 이게 너네한테 주는 돈에 포함이 되어있는 거라 생각하셨나 보다.

이건 나 만이 겪은 일이 아니었다. 다짜고짜 회사에 쳐들어와서 우리를 감시하며 일 시키는 클라이언트, 우리의 자료를 몰래 보며 이거 저거 비교하던 클라이언트 등등...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 그러나 구조상 용역은 아무래도 시키는 쪽이 마음대로 하는 경향이 종종 있다.

누구나 다 그렇듯이.




그렇게 다양한 일들을 하다가 '대상포진'을 만났다.

그 병이 걸리기 직전 꽤 큰 회사의 IT 관련 프로젝트의 킥오프 미팅을 갔었다. 두렵고 불안했고 잠이 오질 않았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될지 빤하게 그려졌다. 항상 그랬다. IT, 건설, 제조, 정책, 과학 등등 날마다 새로운 분야를 만나다 보니 짧은 시간에 그걸 파악하는 것도 일이었다. 마음에 부담이 컸나 보다. 입술에 갑자기 난 물집은 얼굴 전체로 퍼졌고. 결국 일주일을 집에서 내리 쉬게 됐다.

몸과 맘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술 담배도 안 하고 나름 꾸준히 걷기 운동도 했는데, 계속 쪼이고 부담이 생기다 보니 나가떨어졌다.


'왜 내가 이러고 있지?'


아픈 내가 밉고, 그들보다 스펙이 모자라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주는 내가 싫고, 좀 키도 크고 세게 생겼다면 덜 했을까? 애쓰는 대표님과 이사님 등이 맘 아픈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결국 병이 낫고 좀 더 버티다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지금의 나라면 그만두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뭔가 이렇게 살아선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일단 아무 생각도 없이 푹 쉬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영국으로 잠시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글을 썼다.

세상에서 가장 글 못쓰는 쓰레기에다 체력 고자는 그래도 한 번 '글 못쓰는 쓰레기'는 벗어나고 싶어

중편 소설을 탈고하고 공모전에 도전해

이제는 뭐 익숙해서 아프지도 않은 낙방을 만났다(안녕? 오랜만이야)


그래서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를 하다가

공공기관 사보의 인터뷰 글을 쓰고 편집을 했다.

그러다 어떤 회사를 보게 된다. 글 쓰고 편집하면서 PT를 함께 하는 회사

지원했고 뭐 거기서 일을 하게 됐다.


돌고 돌아 다시 프레젠테이션. 정확히 말해 제안서를 쓰는 일을 하게 됐다.



지금의 내가 그때 나를 만난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최선을 다해도
최고의 결과가 오지 않을 수 있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세상은 너에게 빚진 것이 없으니
선의와 정성이 꼭 제대로 돌아올 수는 없다고
그러니 맘 좀 놓고 살고 네가 아끼는 사람들이 다치더라도
그만 아파하라고 너는 히어로가 아니라고...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 좁은 나라에 모여있어서
불안해서 마음이 팍팍해진 거라고
그리고 네가 아끼는 사람들도 다 모든 걸 이겨낼 힘이 있다고.



며칠 전에도 그 회사 대표님과 통화했고, 오랜만에 찾아뵙기도 했는데 계속 선하고 성실하게 사업을 꾸려가고 계신다. 부침이 있었지만. 극복해 내고 계시고. 그냥 내가 너무 걱정하고 몰아친 것 같다. 회사 나올 때 그분들에게 미안해하며 걱정했는데, 그분들은 나보다 훨씬 단단하고 저력이 있는 분들이었다. 마음에 큰 위로가 됐다.

나레기 병 이거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병이다. 아마 고위직에 있고 잘 나가 보이는 사람도 이 병에 걸려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쓰레기 아닌데... 충분히 성실하고 명석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