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는 잘 풀리지 않았다.제 아무리 2000년 밀레니엄 시대라도 한국은 뭐든 미제만 선호했다. 뭘 하려고만 하면 마치 주변에서 어떤 것도 내 편이 아닌 것처럼 좌절하기를 반복했다. 열심히 한다고 그것이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누군가 말하길, 인생이란 본디, 비를 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비 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또 누군가 말하길, 인생은 그저 버티는 거라고. 버티다 보면 알아주는 사람도 생기고,
버티다 보면 한 줄기 서광도 비치고 하니 그저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어릴 적에 내가 제일 잘하던 운동 종목은 '오래 달리기'였다. 반면, 단거리 달리기는 제일 못하는 운동이었다.
언제나 가장 늦게 결승선에 들어왔다.
딱히 잘 뛰는 친구들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냥 '나는 잘 못 뛰는 아이구나'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오래 달리기는 언제나 메달권이었다.
상도 받아봤다.
일 등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이 등은 했다. 전교생 학년 별 오래 달리기에서도 매년 이 등을 했다.
마라톤 절반 길이 코스에서도 역시 나는 이 등으로 들어왔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 달리기는 못하지만 끈기가 있는 아이구나'라고..
바라던 영어전문가로서의 꽃길을 걷지 못하고 영어를 쓰긴 하지만 활용하는 업계인 무역 및 해외영업 쪽으로 발길을 돌린 건영어권에서 나를 받아줄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최소 조건이 영미권 유학이라니. 회사를 다니며 30대가 넘고 사회와 싸우는 것이 점점 지쳐가던 어느 날 무작정 남자친구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아이는 오랫동안 생기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지 않은 건 나이가 많아서였을 수도 있고, 몸이 너무 약해서였을 수도 있다. 당시 내 몸무게는 48kg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혼과 동시에 커리어도 내려놓고 신랑과 연고 없는 지방으로 내려와 살면서 아이도 없으니 존재의 이유가 사라진 느낌이었다.아침에 일어나고 신랑 아침밥을 차려주고 나면 할 일이 없어서 티브이를 보다가 장을 보러 마트에 나갔다 다시 집에 와서 저녁준비를 하는 반복된 삶. 행복이란 바라는 것을 작게 줄이면 찾아오는 것이라 하지만 존재를 인정받는 바람은 인간의 기본욕구 중 하나라서 더 줄일 수는 없었고, 당장 매일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괴로울 정도로 힘든 하루였다.
하지만 인간은 저항하는 동물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꾸역꾸역 상황들과 저항하면서 지내던 어느 날. 신랑이 해외 주재원으로 발령이 났고 주재원 생활을 하는 중에 잠시 한국에 나와 시도한 시험관 시술에서 첫 번에 바로 쌍둥이가 들어섰다. 여자는 서른 넘으면 다 노산이라고 하니 기대하지 말라고들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늘도 돕지 않는 거 같던 내 인생에 그 어렵다던 시험관 시술을, 37살에 나이에, 단 한 번의 시도로 아이가 두 명이나 생겨 버렸다.
쌍둥이를 건강하게 출산했고 내 자식이지만 너무 예뻤다. 늦게 온 선물이라 더 이쁜지도 모르지만. 기쁘게도육아맘으로 등극했고 인생의 비로소 새로운 챕터가 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전업주부이자 엄마로만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아이들이 있으니 세상에 못할 것이 없었다.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 뭐라도 해보자, 20대, 30대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루어보자는 무모한 도전을 했다.
하지만 한동안 멀리한 영어공부를 다시 떠올리니 괴로웠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악착같이매달렸던가. 무식하게 공부하는 스타일이다. 늘 혼자만의 목표를 설정하고 남이 알아주던 말던 이루려고 하는 성격인 나는, 이 분야에서만큼은 잘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자!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말자! 꿈이 많아 여러 가지 목표를 설정하는 바람에 참 과하게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기약 없는 노력 곧, 장 시간의 매듭 없는 기다림은 결국 괴로움과 매너리즘으로 돌아왔다. 누구든 이런 아픈 손가락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리라.
어떤 이에게는 그게 운동 종목이겠고, 어떤 이에게는 학업, 어떤 이는 가지고 있는 기술, 고시 공부나 자격증 공부, 예술이면 그림이나 음악이겠거니.
어쩌다 보니 난 그게 영어였다. 고작 언어 하나
더 하는 걸로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언어를 그냥 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달랐으니까.
세련되게 네이티브 미국인처럼 영어를 구사하고
싶었고, 에세이도 진짜 멋들어지게 문학처럼,
때론 하버드 교수처럼 때론 명철을 겸비한 존철 살인의 사설처럼. 오직 나와의 싸움이었다.
어제의 나보다는 오늘의 나는 반드시 조금은 더
나아야 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영어 공부 좀 했고, 어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근무했고,
해외영업 파트에서 일한 경력을 언급하면 요즘은 다들 이렇게 말한다.
‘주변에 영어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라고.
틀린 말도 아니다. 영어가 별 것도 아닌데. 미국에서 살면서 영어 구사하고 살면 영어 사용하는 사람들, 한국에서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상 좀 받고, 토익 점수 900점 이상인 영어 강사도 너무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영어를 정말 잘하는 이들을 본 들 알아볼 수 있을까? 내 말은 한국사람이라도 한국말을 그냥 하는 사람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에세이를 써도 그냥 쓰는 사람과 정말 잘쓰는 사람이 있듯이. 영어도 그렇다. 그걸 비 영어권 국가인 한국인들이 듣는다고 알 수 있을까? 잘해도 구분이 어렵다.
서류 앞 줄에서 언제나 밀려나는 상황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주변 친구들은 점점 취직하고 자리 잡고 결혼하자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이 생겼다.
원래 남들과 같은 생각하고 똑같은 길 따위는 안 가겠다 결심하던 당찬 여자였던 내가 실상은 도태되는 거 아닌가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기회는 다 거절하고, 유일하게 인생에서 내 선택으로 시작한 ’ 영어‘ 이거 하나는 꼭 사수하자 결심했다. 하지만 실은 한국에서 인정을 못 받는 현실 덕택에 오히려 더 악에 받쳐 열심히 했던 것도 한 몫했던 것 같다.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너네보다 훨씬 잘해서 한국 최고의 실력자가 되고 말 테니까.'
그렇게 악에 받쳐서 공부를 하고 까이고 할 때마다 다시 일어나서 부족한 면을 갈고닦았다.
다음번엔 결코 같은 걸로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20대는제아무리 경험이 많아봐야 서류의 부실함을 감출 수가 없다. 하지만 영어 실력만큼은 직접 본 사람들은 어딜 가나 인정을 해주었다. 매일 3시간씩 자면서 공부를 했다. 당시에 지인 중 한 명이 한번 자리에 앉으면 몇 시간이고 엉덩이를 들지 않고 집중하는 날 보고 의대생인 줄 알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도덕선생님께서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고 하시던 말을 순진하게 믿던 세대에태어났다. 그래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문구만 가슴에 새기며무지막지하게 공부를 했는지도 모른다.
언제 남들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볼지는 기약이 없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당장에 눈앞엔 가시밭길이 끝도 보이지 않게 펼쳐져 있더라도 '언젠가는 이 가시밭길이 끝나겠지. ' 란 믿음은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았다.
내 20-30대 카톡 프로필 사진은 개구리가 학에게 먹히려는 순간에도 학의 목을 잡고 조르던 사진으로 예쁜 셀프 사진들을 올리던 또래와는 사뭇 달랐다.
그때의 심정은 어린 시절 느린 걸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매달권에 들었던 오래 달리기 경주 때처럼 never give up의 정신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경주마를 앞만 보고 달리라고 눈 옆 시야를 가리듯, 나도 주변을 보지 않고 내 앞만 바라봤다.
그리고 계속 달렸다.
물론 십몇 년 세월을 단 몇 자로 그 느낌이 다 와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세월 가슴속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품고 살았기에 지금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그리고 공부에 왕도가 없듯이, 성공도 지름길이 없으며 세상에 요행으로 얻는 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진리를 믿었기에 난 가장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20대에 가장 찬란하게 빛나지 못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청년은 지금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