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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대에 들어간 둥이엄마

38세 만 0세 쌍둥이 육아와 병행하며 통대시험을 치다

꽃은 저마다 피는 시기가 다르다.


 결혼 후 7년이나 아이도 못 낳는 부인에 며느리가 되어 늘 죄인 같은 마음이었는데 감사하게도 네팔 주재원 생활 중에 시험관 시도 딱 한 번으로 쌍둥이가 배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열 달을 꿈같이 행복했다. 하지만 기쁜 마음도 잠시. 출산 후에 아기들과 다시 해외로 나가지 못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기이한 질병이 지구를  강타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전 세계는 수년간 마스크를 쓰고 이동을 금지당했다.


우리가 신랑이 있는 네팔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는 코로나기간 중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건 한국이라는 신랑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어디 그것뿐이었으랴. 쌍둥이를 데리고 가면 회사에서 중책인 신랑이 애 보느라 일에 지장 생길까 눈치를 받았을 테다. 회사에서 많은 돈을 들여서 일만 하라고 가정부에 기사도 딸려주는 건데.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신랑이 없는 둥이 육아는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이 태어나고부터 매일같이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무슨 요일이었어? 정말 그랬다. 단어도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났고, 내가 누구인지도 가물해졌다. 우리 집 주소와 내 전화번호, 심지어 부모님 이름과 생년월일, 집 비밀번호까지 생각나지 않았다. 말도 어버버 하는 거 같고, 출산을 위하여 몸의 모든 근육이 이완되어 (뇌도 근육이고, 손도, 혀도, 성대도 근육이다) 혀가 풀렸고 기억력이 흐려졌다. 치매가 오는가 싶어 무서워졌다. 때마침 기사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치매가 유행처럼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예쁜 아가들을 두고 치매?

그것은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꽃도 한번 못 펴보고 퇴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만 1세 쌍둥이 육아를 병행하면서 언어를 신의 경지로 잘하는 이들이 간다는 통번역 대학원에 도전하게 되었다. 포부는 그럴싸해도 통번역의 세계는 결코 쉬운 분야는 아니기에, 여타 입시생들처럼 학원을 등록해서 일 년은 입시생으로 살 작정을 하고 올해 시험 유형을 알아보고자 시험 원서를 한 군데만 지원했다.

신랑이 계속 원서 내라고 독촉한 이유도 한 몫했다. 육아하기도 정신없고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이제는 나보고 통대학원까지 가서 공부를 병행하라고 하냐며 한바탕 다툰 다음이다.


 하지만 전기 대학 원서는 전부 마감되었고 남은 후기대학 중 한 군데만 원서를 쓰기로 했다. 시험 유형파악 목적이니 원서비를 아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주에 있을 외대 시험을 위해서 급하게 강남 학원에 가서 서울 외대 대비반 4일 수업에 등록했다. 급하게 영작문 수업도 같이 듣고. 어차피 이제부터 시작이기에 마음을 졸이진 않았다.


그렇게 우후죽순으로 준비해서 1차 시험을 치러 학교에 도착했다.


 1차 에세이 시험이 시작되면 먼저 영어 리스닝을 들려준다. 그날은 보통 통대 시험에 출제되지 않는 경제 금융 관련의 소재를 한참 들려주었다.  매우 어려웠지만 내용이 들리긴 했고, tapering(양적 완화)과 금리인상, 부동산 등 경제 분석 내용 등의 내용을 참고로 하여 질문 2개에 대한 답을 전부 영어로 에세이 쓰라고 두 장의 긴 종이를 주셨다.


순간 과거 미국 리먼 브라더스 사태- 트리플 AAA 부동산 채권 버블 사태가 떠올랐다. 짜깁기하면 대충 그림이 나올 듯한 비슷한 경제, 시사 정보 조각들을 모아서 2가지 문답의 답을 다 할 수 있었고, 떨어지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적고 나가자는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한 자 한 자 신중하게 종이 두 장을 꽉 채워 냈다.




 꿈이 좋았다. 내가 합격한다는 꿈이었다. 그런데 엄마도 비슷한 꿈을 꾸셨고 1차를 합격하고, 2차 구술 면접은 임 학과장님과 고 교수님이(1년이나 지난 나중에야 누군지 알게 됨) 계신 방에서 오전 첫 타자로 들어갔다. 총 200명 정도 대기실에 있었는데 순번 80번대인 내 이름. 김효정, 세 글자가 제일 먼저 면접 순서 1번으로 칠판에 적혔다. 안내해 주시는 학생 분이 날 부르고 따라오라며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어딘가 방음이 매우 철저한 방들이 있는 층에 내려주었다. 면접 순서 1번이라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임 학과장님과 외국인 교수님 한분 그리고  다른 한국인 교수님 한 분 이렇게 세 분이 앉아계셨다. 긴장하지 말라며 편안하게 영어지문부터 들려주셨으나 고작 4일 통역 훈련한다고 될 일도 아니니 아무 기대를 안 했던 나나 우리 가족들은  최종 합격 소식에 놀라고 말았다. 게다가 학교로부터 입학 장학금을 받았다. 그 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가장 먼저 단지 운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내 노력, 눈물, 번뇌, 고통, 괴로움.. 들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쳐갔다. 그 오랜 노력들이 그냥 다 헛일은 아니었나 보다. 육아, 경력 단절과 시험관 및 5회 전신마취와 절제수술 뒤 회복도 안된 채로, 2년 간 밤낮없이 쌍둥이 수유로 잠도 거의 못 자 속 빈 강정처럼 굳어버린 머리로 합격했다. 스스로를 다잡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덜컥 합격 소식을 듣고는, 찰나지만 머릿속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던 문구가 떠올랐다.



입시학원에서 합격했으니 합격소감문을 적어서 보내달라고 연락이 왔길래 혹시 4일 대비반 수업 들은 경험만으로 합격소감문을 적어도 괜찮겠는지 여쭤보니 그건 어렵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흔히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의 입시 기간을 거치는데 준비 없이 들어간 것만도 노장에게는 엄청난 이득인 상황이니 아무래도 좋았다.


영어를 가장 잘해야 들어가는 통대를,
영어를 가장 못하는 여건과 몸 상태로
입학했다



 떠올리면 입학할 당시는 출산 여파로 퉁퉁 부어있는 온몸과 마디마디 등 통번역 기술을 배우기 위한 신체가 아니었다. 손마디가 한참 부어서 펜이 안 잡혔다. 손목 인대도 늘어나 타이핑을 치기가 힘들고 아팠다. 아이들 생후 2년간 잠을 거의 못 잤더니 원래도 안 좋은 시력이 훨씬 나빠졌고, 난시가 심해졌다. 혈액순환이 안되고 머릿속이 멍하니 어떤 신경신호도 전달이 안 되는 느낌이 들었다. 단어 암기는 물론이고 3분 통역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뇌를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없는 고장 난 상태로 통번역대학원 신입생이 된 것이다.


몇 년간 임신 및 육아에만 올인했는지라 다시 공부를 하자면 다듬어야 할 부분도 많이 있고, 오랜만에 감각을 되살려야 했다. 혼자 생각이지만, 서류에 임신 육아 이력을 적는 기재란이 있었다면 아마 난 뽑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에세이만으로 뽑아주신 건 가능성을 봐주신 거라고 생각하고 믿어주신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진짜 열심히, 이제껏 해 오던 것보다 몇 배로 열심히 노력해야 했고 날 믿어주던 분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태어난 만 0세 둥이들을 위해서도 멋진 엄마가 되어 주고 싶다 등 각오를 무수히 다졌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30대에 결혼을 하지 말고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해봤다. 지나고 나서 후회하면 뭐 해. 잊어버리고 공부하자는 생각으로 버틴 시간인 거 같다. 20대 갓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부터 아직 신체가 힘껏 도와줄 30대 초반 동기들과 경쟁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나는 무식하게 공부하는 스타일이고, 한번 마음을 먹으면 하는 사람이니까. 

그저 그런 의지로 버틴 거 같다.

 사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은 웃음만 난다. 그 후로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악으로 깡으로 버텨내었다. 지금도 여전히 깎이고, 무너지지만 끈기로 인내하여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있다. 2022년, 그렇게 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년남짓 경력 단절 이력을 깨고 인생 새 챕터를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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