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nah Jun 01. 2024

다음 생에는

James 아빠의 딸 Hannah로 태어나

아이를 잘 기다려 주는 부모를 가진 아이들은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나의 아버지는 성격이 너무나 급해 약속 세 시간 전부터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고, 적어도 한 시간 전에는 약속 장소 주변에 도착을 한다. 교통체증에 대한 태도는 더 극단적인데, 내가 어렸을 때는, 아니 결혼 전까지만 해도 가족단위로 어딘가 움직여야 할 때마다 새벽 3-4시에 일어나 차를 타야 했다. 단지, 차가 밀리는 걸 참을 수 없었던 아버지가 내어 놓은 특단의 조치였는데, 난 그게 너무 힘들고, 싫고, 그래서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다. 새벽형 인간인 부모님과 동생은 알람이 울리면 벌떡 일어나, 일어나는 순간부터 샤프한 의사 결정을 내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의 뇌 기능을 즉시 탑재한다. 반면에 나는,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는 날이면 하루 종일 축 처져서 아무리 낮잠이나 쪽잠으로 기력을 회복하려 해도 가능하지 않았다. 우울증이 깊어가던 무렵엔 영원히 눈 뜨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밤이든 낮이든 잠이 들기 전에는,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눈을 뜨고 내일을 맞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고문을 받는 듯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부모는 항상 조급했다. 빨리 성공해서 우리를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네 동생은 이미 자기 분야에 이름을 널리 알려 우리 한을 풀어줬으니, 이젠 네 차례다, 어서 시험 합격해야지.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성공을 향한 집념. 나는 그냥 평범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은데, 그들에게 안주와 단념은 없었다. 그리고, 그 성공에의 질주는 항상 자식을 위해서라는 희생의 허울 있어서, 자식인 나는 그 어떤 말로도 그들을 멈출 수 없었고 멈추어서도 안되었다. 다 나를 위한 거였으니까.


부모의 이런 조급함이 마음속 깊이 자리한 불안 때문이라는 걸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내가 그런 부모를  이해했을 리 만무했다. 문제는, 그런 불안을 전혀 수면 위로 떠올려 본 적도 직면해 본 적도 없는 그들이, 자신의 불안과 그 불안으로부터 오는 조급함을 자식들에게 그대로 전가했다는 데 있었다. 부모 역시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받은 건강한 정신적 자원(이를테면 자존감, 독립심, 회복탄력성 등)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성숙한 인간으로 기능할 수 없었다.


나와 내 동생은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도 부모의 눈치를 보고 부모가 던지는 감정의 돌들을 그대로 맞았다. 내 아이는 태어나고 2년 정도 몸이 아팠는데, 그 당시 힘들어하는 아이를 안고 우는 나를 보며 아버지는, '아이가 아픈 건 네가 인생을 편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너 때문에 애가 아픈 거야'라고 했다. 그렇게 원인을 선언해야  본인의 불안을 견뎌낼 수 있었던 아버지. 건강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사위가 큰 딸을 진짜 사랑하는 게 맞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불안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그는 너를 진짜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거야'라는 막말을 던져 내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래도, 견뎠다. 피가 철철 흐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버리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가여웠다. 잘 길러내고 싶은 아이도 있었고, 무엇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주는 남편이 곁에 있었다.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나를 보면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이제 덜 불안하실까?


아버지는, 자식들이 독립적으로 인생을 살고자 하면, 다시 말해, 부모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인연을 끊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다는 의사도 엄마를 통해 여러 번 전달했다. 어릴 땐 부모로부터 내쳐지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 무조건 그들을 따랐다. 싫고 무섭고 불안하고 죽을 것 같았지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단 한순간이라도 행복한 시절이 있었을까? 이미 내 가족과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는 지금, 자식을 키우는 엄마가 된 지금, 그런 시절을 떠올려 부모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 그들도 부모니까, 차갑고 잔인했지만, 그래도 결국엔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을 거야. 내가 키워봐서 알지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니까.


따뜻한 말이 오가는 대화를 안 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자식의 도리는 하기 위해 애쓰며 살았다. 대답 없는 카톡을 수십 번 날리고, 마주할 일이 생기면 미소 짓고, 아이에게 예의 바른 인사를 시키고, 걱정으로 안부를 물었다. 이런 마음이 전해지고 있는 걸까? 난, 잘못한 게 없지만 용서받기를 기다린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아버지가 모는 자가용 조수석에 앉은 내가 난폭하게 운전하는 아버지를 보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 불안을 들키는 순간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낼 것 같아서 짐짓 태연하게 허밍도 해가며 불안감을 감추고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액셀을 밟았고 차는 굉음을 내며 앞의 트럭 후미를 향해 돌진했다. 꾹꾹 눌러왔던 불안감이 순간 엄청난 공포로 바뀌었고, 난 온몸이 경직되어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아버지가 몰던 차는 일명 '칼치기'를 하며 1차선으로 빠져나갔다. 그래, 아버지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경직이 풀리지 않은 채 겨우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때의 아버지는, 모든 이를 다 드러내며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웃고 있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흘리며, 한 동안 그렇게 박장대소했다. 그날의 아버지 얼굴이 잊히지가 않는다. 그래서, 아직도, 너무 무섭다.


결혼 전, 남편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학 시절  친구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사람들을 잔뜩 태우고는 신이 나서 객기를 부리고 싶었는지 130마일(대략 시속 210km)에 가까운 속도로 차선을 계속 바꿔가며 곡예 운전을 했더랬다. 몇 번의 요청이 묵살된 끝에, 심각하게 차를 세우라고 소리를 쳤고, 차가 선 후 남편은 자기가 왜 그 친구의 멍청한 객기에 동조할 수 없는지 정확히 알려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심각한 도덕적 결함이나 심리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더 이상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순간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 이 사람은 자신을 소중히 할 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제대로 아낄 줄 아는 사람이겠구나. 이 사람은, 아이가 있다면 아이를 위협하거나 괴롭히며 웃을 거리를 찾지 않고, 위험 속에서 아이를 지켜줄 수 있겠구나.


제임스 아빠는 딸이 없다. 아들을 둔 아빠인데, 내가 여자이다 보니, 또 내게 좋은 아빠가 없다 보니 그냥 저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내가 그 딸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제임스 아빠는 9살 난 아들이 매일 하는 수많은 실수들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고 다음번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을 준다. 혹여 아이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화내는 법이 없다. 부모란, 아는 지식을 총 동원하고 가지고 있는 사랑을 다 끌어모아 자식이 이 세상을 씩씩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존재라고 믿는 그는,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아이를 위한답시고 혼자 무언가를 결정해 버리지 않고, 늘 아이의 의사를 묻고, 기다려주고, 문제가 있다면 함께 해결책을 찾고자 노력한다. 아, 이 아빠 너무 좋다. 자식을 존중하다니, 어린 자식도 존중받을 수 있다니.


제임스 아빠는 과연 언제 아이에게 화를 낼까? 화가 나도 참는 것일까, 아니면 화 자체가 나지 않는 것일까. 그 사람의 마음을 알 길은 없지만,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므로 화에 대한 역치가 굉장히 높다는  알 수 있다. 그에겐 성장 중에 겪은 트라우마가 없고, 딱히 기억에 남을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매우 적었으며 따라서 마음속에 트리거로 작용할 만한 요인들이 없는 거다. 그래, 이것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아주 기본적인 마음의 토양이다. 이 건강한 기반은 기다려주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우리가 앞으로 헤쳐나갈 고단한 세상에 대한 면역력이다. 실수해도 다시 도전해보고 싶은 힘, 이번엔 실패했지만 다음에는 성공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는 의지, 그 과정이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즐겁지 않냐고 스스로를 격려할 수 있는 여유, 이 모든 내면의 힘은 부모 혹은 주 양육자가 주는 편안하고 따뜻한 양육 환경으로부터 길러질 수 있다. 

 

부모와 살면서는 매일 눈치를 보며 침대에서 겨나듯 하루를 시작했다. 주말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아침형 인간인 동생과 비교하며, 우울증에 시달려 하루종일 무기력하던 나를 무능하고 한심하게 바라보던 부모의 눈빛은, 정말이지 쉴 새 없이 내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난 이제 절대 주말에 일찍 일어나지 않는다. 9시가 다 되어가는 때에 부스스 일어나 내 품으로 파고 들어오는 아들과 더 오래 뒹굴거리다,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면 그제야 몸을 일으켜 게으른 아침을 시작한다. 남편은 우리보다 더 늦게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이 너무 좋고, 우리 가족 모두가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릴 수 있는 주말 아침이 항상 기다려진다. 내가, 내일 아침을 기다릴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인생에 이런 날들이 오다니. 이 모든 것이 제임스 아빠가 가져오는 기적이다. 이번 생에는 아내이지만, 다음 생에는 그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





*대문사진, 대부도 석양 by hannah




행복한 순간에도 늘 불안했습니다. 뒤따를 불행의 근심에 압도되어 기쁨시간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어요. 그 불안을 떨쳐내고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실은 제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기억하기 위해 이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하면서 슬픔을 덜며 조금씩 가벼워졌고, 그렇게 비워진 자리에 비로소 순수한 행복이 차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여러분의 행복한 시절과 행복의 가치를 알기 위해 겪어 오신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제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이나 좋았습니다. 나누어주신 소중한 말씀들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몰라요.


그동안 '행복의 찰나들'을 읽어주시고 함께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물처럼 찾아오는 행복의 순간들을 온 마음으로 만끽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이전 29화 이상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