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듀드노, 십이년 전만 해도 생소했던 이 지명은 지금 내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2012년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부터 일 년에 두서너번 다녀갔고 한국에서 살았던 때에도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는 일 년에 두 번씩, 한 번 방문할 때마다 5-6주씩 머물렀던 곳이다. 시부모님이 45년 전 정착해 이후 쭉 살고 계시기 때문에 남편에게는 유일한 'Home'인 셈이다. 이민 오기 전부터 익숙했던 땅,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나를 상상해 봤을 때 행복하고 여유로웠다. 마주치는 모두가 나를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친절한 커뮤니티가 있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99프로의 사람들은 양보할 준비가 되어있는 곳.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일 년 내내 어떠한 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롭고 순조로운 곳.
빅토리안 양식의 건물들(모두 호텔),겨울의 피어(왼쪽)와 봄의 피어(오른쪽)
인구가 2만여 명도 안 되는 작은 타운이지만 5월부터 9월까지는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날씨가 좋은 날은 말할 것도 없고, 좋지 않은 날에도 우비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피어 위를 걷거나 바닷가를 따라 빗 속 산책을 즐긴다.
사진에 보이는 반도의 둥그스름한 끝은 그레이트 옴(The Great Orme)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경사진 길을 따라 차를 타고 올라가거나 티켓을 사서 트램이나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북쪽 땅 끝에 서서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뒤돌아보면 특이한 지형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자연경관까지 감상할 수 있다.
그레이트 옴에는 오래된 구리광산이 있는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볼 수 있다(헬멧 착용 필수).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듯한 포인트를 여러 번 통과해야 하고 불빛도 환하지 않으므로 폐쇄공포를 느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우리나라의 광명동굴 같이 문명화된 동굴이 아님). 기념품샵에서 파는 특이한 암석들은, 내 눈에는 그냥 다돌인데, 아들 눈에는 모두 각각 독특하고 특별해서, 우리 가족은 아들이 용돈을 모아 광산에 데려다 달라고 하면 기념품샵만 방문하기도 한다.
그레이트옴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West shore인데 자갈밭인 오른쪽 바닷가와는 달리 모래사장이 길게 뻗어있고, 석양이 너무나 아름다워 많은 로컬 사람들이 저녁 식사 후 개나 아이들과 산책하러 오는 곳이다. 바람이 많이 불지만, 그래도 Conwy Mountains, (남쪽으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Conwy Castle이 한눈에 보이는 경관을 자랑하는 특별한 곳이므로 Llandudno 시내에 숙소가 있더라도 꼭 한번 West shore로 나가보시길 추천한다.
시내에는 작은 전쟁박물관이 있는데 입장료가 비싸지 않아 한 번쯤 구경해 볼 만하다. 아기자기 한 소품들로 잘 장식해 놓았고, 세계 2차 대전 중 Llandudno에서 사람들의 일상이 어떠했는지, 전쟁 중 이 지역의 공헌은 무엇인지 알 수 있어 꽤 유익하다. 최대 한 시간 정도 소요.
타운 내 제일 맛있는 커피집은 Providero. 철저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는 한국에서도 커피가 맛있다고 소문난 집은 여건이 허락하는 한 두세 시간을 운전하고 가서라도 맛을 보고 살았었기 때문에, 커피에 관한 한 나름 경험이 많은 편이라 말할 수 있다. 국제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는 동생이 만들어주는 라테에 비하면 라테아트는 별 볼 일 없지만, 약간의 산미, 씁쓸하지만 깊고 풍부한 커피 향에 고소한 우유가 잘 어우러진 플랏화이트는 프로비데로 최고의메뉴이다. 날씨가 좋으면 바깥 좌석부터 차서 실내가 한적한데, 개인적으로는 이곳의 실내 인테리어를 좋아해서 늘 안쪽 벽돌벽 가까이에 앉는다.
Bodafon Farm은 랜듀드노에서 제일 큰 농장인데 수십 가지 멸종 위기의 부엉이들이 지내고 있는 곳이라 농장을 방문하면 여러 종류의 부엉이나 올빼미들을 만나볼 수 있다. 트랙터를 타볼 수도 있고, 농장 내 여러 동물들 먹이도 줄 수 있는데 다들 귀엽지만 특히 사슴들이 너무 예뻐서 먹이를 주면서 홀린 듯 바라보게 된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언덕에는 아이들을 위해 지어진 성 놀이터가 있어서 아이가 더 어렸을 때는 이곳에서 몇 시간씩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농장 펍 푸드는 대부분 다 맛있는데 특히 Goat's cheese 화덕 피자가 일품이니 이곳에 방문하신다면 꼭 한 번 드셔보시길 추천한다.
랜듀드노에는 시내를 돌아다니는 산양들이 있는데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페이스북에 '도로를 점령한 산양 떼들', 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포스팅이 올라왔었다. 이곳에서는 길 가다 야생 동물들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웨일스에는 사람보다 양이 많다, 는 건 사실일 확률이 높다. 농장이 많고 대부분 양이나 젖소를 키운다. 근데 양은 산에 가도 많다. 야생 양들은 자기들끼리 뭉쳐 다니며 자유롭게 풀을 뜯는다. 여우나 말도 자주 보이는데, 특히 야생말들은 (분명 야생인데) 말을 걸면 다가와 말 거는 사람을 한참 동안 지긋이 바라보기도 한다. 지퍼백에 새 모이를 넣고 다니다가 산책 중 로빈을 만나면 손에 모이를 놓아준다. 그럼 내 손 위에서 모이를 먹는 로빈을 볼 수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야생동물들(단 소들은 농장 소속)
보통 여행객들은 5일에서 7일 정도 묵으며 이곳을 즐기는데, 그들은 내년에도 오고 그다음 해 여름에도 오기 때문에 짧게 머물다 간다. 내가 다니는 수영장은 호텔에 달려있는 피트니스 내에 있어서 수영을 하러 가면 호텔에 머무는 관광객을 종종 만나는데 그들 중에는 한 달 정도 랜듀드노에 살기 위해 왔다는 사람들도 있다. 가장 길게 지내고 있는 장기체류자? 는 1년반째 랜듀드노에 머물고 있는 40대 중반의 여성인데 수영장에서 자주 보다 보니 인사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디지털노매드라서 영국 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고 있는데, 이곳이 특별히 너무 좋아 1년 반째 거처를 옮기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녀를 계속 머무르게 하는 (지루하지 않은) 특별함이 있겠지만, 동시에 여유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편안한 곳이기에 이런 장기 체류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관광지로 발달했지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 Llandudno. 편리함과 아름다움의 조화를 잘 유지하며 사람과 동물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곳, 이곳이라면 한 달 살기 아니 일 년 살기도 가능할 것 같다.
Llandudno 시내 유명한 레스토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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