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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Jul 25. 2023

예민한 시누의 충고

결혼 전부터 나는 한국의 줄리(시누 이름)로 불렸다. 우린 키와 몸무게가 똑같고 성격까지 비슷한 데다 둘 다 청결에 있어서 강박에 가까운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불려진 것 같다. 큰 차이가 있다면, 줄리는 예민하고 섬세한 남자를 만나 음료들이 줄 맞춰 서있는 냉장고를 갖고 먼지 한 안 나오는 집에서 산다는 것이고, 저장 강박자들(시부모님)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줄리의 남동생과 결혼한 나는 집안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쓰레기들을 치우고 또 치우고 냉장고를 열면 늘 넘어져있는 병들을 계속 세워가며 산다는 것이다.


딩크족인 줄리부부는 모든 일을 계획대로 실행하고, 늘 깔끔하게 정리정돈이 된 그림 같은 집에서 산다. 자신과 비슷한 남자와 결혼한 줄리의 강박은 나이가 들수록 심해졌다. 게다가 난 3년간 코로나 사태로 인해 줄리는 주변사람들이 걱정할 정도의 결벽증을 갖게 되었다. 급기야 자신이 일하는 은행에서 심각하게 카운슬링을 권유받기도 했다. 대면 업무를 하는 은행에서 고객 상대하기를 꺼리고 동료들과 식사나 악수조차 하지 못하는 줄리의 상태는 사람들의 걱정을 사기 충분했다.


나도 예민하지만 줄리는 나보다 훨씬 예민하므로 줄리보다 내가 놓치는 것들이 항상 많았다. 남편과 살면서 예민함을 잃어간다고 생각해 시누를 만날 때면 평소보다 더욱 긴장하고 최대한 많은 걸 캐치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녀는 나보다 늘 앞서있다. 예민한 사람이 예민하지 않은 사람을 배려하기는  쉽지만, 예민한 사람이 더 예민한 사람을 배려하기는 정말 힘들다. 그녀의 니즈를 알아차릴 수가 없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느낀다.


그녀는 점점 불안해하고, 완고해지고 있다.


며칠 전 코사무이로 휴가를 왔다. 지난겨울부터 동생네와 함께 계획한 휴가였다. 방콕 공항에서 동생 가족을 기다리는 동안 페이스북에 이번 여행에 대한 내용을 포스팅하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시어머님께 온 WhatsApp 음성메시지를 확인한 남편이,

"줄리가 엄마에게 전화해서 네가 포스팅한 글이 위험해 보인다고 전했다는데?"

라고 한다. 응? 이게 무슨 말?


내가 페이스북에 '여행 중'이라고 소문을 내서 우리 집에 도둑이 들 확률이 높아졌단다. 아니, 그 수가 얼마 되지도 않는 사적 그룹이고, 그들 모두 나의 친구들(잠재적으로 나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들로 본다는 뜻일까?)...인데. 더구나 영국친구는 몇 명 되지도 않고. 이게 무슨 상황일까 잠시 생각해 보고 있는데, 갑자기 2년 전쯤 아는 사람이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의 남편은 네덜란드 사람인데, 시댁에 놀러 갔다가 남편이 앞마당에서 본인 집을 배경으로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귀국 후 그녀는 별생각 없이 그 사진을 자신의 (친구들만 볼 수 있도록) 페이스북에 올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남편의 여동생이 전화를 해 울며불며 난리가 . 이유인 즉, 그 사진 한 장으로 자신들이 누구이며 어디 사는지를 다른 사람이 알아낼 수 있고 해코지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별 말 하진 않았지만, 그때 속으로 생각했었다. 그녀의 시누는 망상경향이 심하고 paranoid 성향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런데 지금, 나의 사랑스러운 시누 줄리가 비슷한 증세를 보인다. 걱정해 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그녀 자신의 불안 때문에 다른 이의 사생활까지 통제하려 하는 데 동조할 순 없다. 그건 그녀에게 도움이 안 된다.


어머니께, 내 페이스북 그룹은 소규모이고 대부분은 한국 사람들이며, 영국에 있는 사람들은 (남편 쪽) 친척들이 대부분이고 런던에 사는 서너 명의 친구, 얼마 전 알게 된 인도네시아인 친구 한 명이 다라고 줄리에게 그렇게 전해달라 말씀드렸다. 모호하고 불특정한 두려움으로부터 오는 불안을, 구체적이고 단호한 사실로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아직은 그렇게 조절할 수 있는 정도의 불안이길 기도하면서.



나를 위한 조언은 언제나 고맙고, 보다 나은 내가 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피드백 수용이 즐겁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번 페이스북 포스팅에 대해 줄리의 예민함이 뻗친 지점에서 나는 그 어떤 상식도 이점도 보지 못했다. 줄리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예민함에 제동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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