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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Aug 10. 2023

둔한 사위지만 미안하지 않아요, 엄마 1

눈치 없는 남자를 만난 예민한 딸

과년한 딸이 십 년 넘게 연애조차 하지 않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자 부모님은 조급해졌다. 인종과 종교와 문화를 막론하고 모두 환영이니 누구든 데려와라, 하셨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인종, 종교, 문화를 가진 남자를 만났다.


극도로 예민하고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는 부모 밑에서 불안정애착을 가지고 자란 나는, 결벽증과 강박증이 심했고 히스테리컬 했으며 극단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 나의 일상은 늘 전쟁이었고 밤마다 피 흘리듯 처참한 몰골로 샤워실에 들어서며 매일의 전투를 씻어 내렸다. 불안해서 불행했다. 


런던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처음 만난 남편(당시 남자친구)은, 깊고 성숙한 사고의 소유자이면서도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을 가지고 있었다. 걱정을 사서 하고 의심이 많은 내가, 사소한 갈등에 '우리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아'라는 진심 없는 말로 상대를 벼랑 끝까지 내몰아도, 그는 '화가 나도 나는 너를 사랑해. 우린 헤어지지 않을 거지만, 이 문제는 해결하고 넘어갈 거야'라며 내 불안을 잠재웠다. 그렇게 나는 성숙한 관계를 배워나갔다.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안정감, 내게 가장 필요했던 한 마디, '난 널 떠나지 않을 거야', 그 말속에서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남편도, 나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고 자기 일에 책임감이 강하다는 장점을 빼면, 게으르고 정리정돈을 못하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실수투성이의 그저 평범한(어쩌면 그 이하의) 사람이다. 그런 그를, 친정엄마는 탐탁지 않아 했다.


첫 손주가 세상에 나온다고 하니 친정 부모님이 런던으로 오셨다. 런던에서 이미 4년째 살고 있던 터라 타국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이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남편이 곁에 있었으므로 무서울 것이 없었다. 아이는 힘들게 세상에 나왔고 이런저런 검사를 받아야 해서, 출산 후 나는 아이와 병원에 머물렀다. 보통 자연분만 후 24시간 내에 discharge(퇴원) 하지만, 아이에게 감염 위험이 있으면 입원시켜 3-5일 경과를 지켜본다. 잠깐씩 병원에 들르며 엄마는 계속해서 남편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나와 함께 계속 병원에서 지내던 남편이 하루에 두 번씩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옷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밥 먹은 그릇을 그대로 두었단 게 그 이유였다. '너 앞으로 어떻게 사니, 앞길이 막막하다 정말'이라며 저주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들을 쏟아내는 엄마.


'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 마시고 한국으로 돌아가세요', 살면서 처음으로 부모에게 뱉어 본 가시 돋친 말이었다.


큰사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장모는 어떻게든 자신이 사위에게 감정이 좋지 않음을 온몸으로 표현했지만(어차피 말은 통하지 않으므로) 눈치가 없고, 자신이 큰 잘못을 하지 않는 한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고 믿고 있는 남편은 그 차가운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자 엄마가 뿜어내는 부정의 에너지는 남편에게 가지 않고 나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누굴 탓해, 내 자식이 문제지' 라며 내가 둔한 사위를 데려와서 이 사달이 났음을 몇 번이고 반복해 가며 이야기했다.


남편이 엄마의 예민함과 냉소를 눈치채지 못해 참 다행이었다. 애정 없이, 비웃듯 안부를 물어도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하는 남편을 보며, '내가 저런 부모를 만나 그동안 너무 마음 고생했다고 이런 남편을 내려주셨나 보다'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남편을 데리고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니 이런저런 기억이 떠오른다. 지난겨울 영국으로 떠나면서 그동안 정말 감사했다고 장인장모께 인사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울컥했었다. 내 남편이어서, 눈치가 없어서, 이유 없이 미움을 받은 6년의 시간을 뒤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며 그렇게 떠난 한국, 그곳으로 돌아간다. 2주간의 짧은 기간 동안 친정부모님을 몇 번이나 뵐 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벌써부터 긴장이 된다.


엄마에게 좋은 사위가 아니어도 아무 상관없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지. 둔한 사위 데려왔지만 엄마에게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 나에게 좋은 사람이니까, 최고의 남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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