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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Aug 26. 2023

예민한 내게 버거운 사람

무 자르듯 인간관계를 끊어낸다면

내게 어려운 사람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실수는 누구나 하지만 그 실수를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따라 관계의 질과 방향이 결정된다. 수습의 첫 단계인 '인정하기'를 못한다면, 관계는, 발전이 아닌 거짓이나 회피 심지어 파괴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살면서 많이 본 건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과 가까워질까 봐 극도로 경계했고, 혹여 늦게 눈치를 챈 경우에는 알게 된 즉시 관계를 끊어냈다. 내게 득이 되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둘 순 있어도, 해가 되는 사람을 참고 견딜 수는 없었다. 그렇게 무 자르듯 끊어낸 관계에는 일말의 후회도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살다 보니, 끊어내기 힘든 관계도 있었다. 남편들끼리, 자식들끼리 주렁주렁 얽혀 있어 나만 끊어 낸다고 끊어지지 않는, 그런 관계.


한국으로 들어가기 전, 아이에게 어떤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지 물었다.

"응, 난 C를 보고 싶고, 또 S와 M도 만나서 같이 놀고 싶어."

M의 이름이 나올지 알고 있었지만, M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며 막상 내가 곧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라고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M은 스스로를 아들의 베스트프렌드,라고 불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M은 늘 하교 후 우리 집으로 다. 평소 예의 바르고 침착하며 귀엽기까지 한 M을 나는 예뻐했다. M에게는 불안도가 매우 높은 2살 터울의 누나가 한 명 있는데, 부모의 사랑이 늘 고픈 이 아이는 틈만 나면 우리 집을 기웃거렸고 폭풍 수다를 떨며 나를 따라다녔다. 늘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내는 M의 누나가 귀찮다는 생각을 슬슬 할 때쯤, 가족끼리 함께 어딜 놀러 가거나 식사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M의 누나는, '이모랑 우리 엄마랑 제일 친하죠?(내가 대답을 안 하고 웃자) 아니 여기 지역에서는 제일 친한 사람 맞죠? 최근에 알게 된 사람 중에는 제일 친하죠?'기어코 나로부터 '응, 그런 셈이지'라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질문의 범위를 좁혀갔다. 인도네시아계 유럽인 아빠와 동남아시아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M과 그의 누나는, 한국에서 어린이집을 다녔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므로 오디오로는 식별이 불가능한 코리안 네이티브였고, 그 아이들에게 영어는 편하지 않은 언어였다. 두 가족이 모여 영어로 대화가 이어지면, M의 누나는 어김없이 내게 한국어로 이런저런 질문들을 해대고 끊임없이 나의 관심을 끌고자 애썼다. 유머러스하고 활달한 성격을 가진 M의 엄마는 짧은 영어 실력으로도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며 모임의 흥을 돋우었다. 나도 그 흥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는 언제나 (그 집 아이들의 질문에 대답을 잘해줘서?) 아이들을 케어하는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그렇게 한 해가 갔다.


사회성 언어가 부족한 M의 누나는 또래와 못 어울리고 여자 어른, 혹은 갓난아이들과 자주 어울렸다. 갓난아이들과 놀아주면서, 그 아이의 엄마들에게 '어쩜 그렇게 아기를 잘 돌보니'란 칭찬을 들으면서. 모든 사람이 같은 곳으로 출근하고 같은 곳으로 퇴근하는 곳, M의 가족과 우리 가족이 살았던 곳, 그곳에선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모든 아이들이 한 데 어울려 놀았기 때문에 M 누나의 행동이 유별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M의 누나는 마음이 아픈 아이였다.


M의 엄마에게는, 친구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보모와 같은 역할을 하는 가까운 지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대학원생으로 바쁜 일상을 사는 와중에도 M의 부모가 저녁 데이트를 갈 때면 아이들의 보모 역할을 자처했다. 어느 날, M의 부모가 늦은 밤 콘서트를 다녀온 날이었다. 그날도 대학원생 친구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9시 반이 되고 그녀가 아이들에게 잘 시간이라고 일러주자, 잘 준비를 마친 M의 누나는 옷 속에 무언가를 숨기고 M의 방으로 향한다. 그리곤 동생에게 하는 말,

"M아, 혹시 저 이모가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지금 내가 주는 이 가위나 커터칼을 사용해."


이렇게 M의 엄마를 통해 전해 들은 M 누나의 상태는 참담했다. 아, 무엇이 아이를 이토록 불안하게 한 단 말인가. 이 아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일화를 마치 재미난 하나의 에피소드인 양 전하는 엄마가 깔깔거리며 웃자, 큼지막한 눈망울을 굴리며 M의 누나가 불안한 듯 자신의 엄마를 쳐다본다. 이내 동조해야만 한다는 듯 입가에 억지 미소를 띤다. 그 엄마가 웃든 말든,

"얼마나 불안했길래 그런 생각까지 했어? 평소에도 그런 생각이 자주 드니?"

라고 내가 M의 누나에게 묻자, M의 엄마가 웃음을 거두고 내가 한국어로 뭐라고 물었는지 되묻는다. 딸 대신 별거 아니란 대답을 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내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였는지 이후 갑자기 화제를 전환해 버리는 그녀.


집에 있던 M과 누나가 인터폰이 울려 대답하면 '너희들 납치당하고 싶어서 그래? 엄마아빠 얼굴 다시는 안 보고 싶어? 누구든 절대로 대답도 하지 말고 문도 열어주지 마'라고 겁을 주던 부부였다. '세상에는 믿을 사람 없어. 엄마아빠 말만 잘 들으면 돼'라는 말을 정말 곧이곧대로 믿고 자라는 아이들의 마음속은 이미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순하고 협조적인 M은 전반적으로 아들에게 좋은 친구이다. 하지만, M의 누나가 함께 있으면 관계의 흐름이 바뀌었. 가족 모두 M의 집으로 초대받아 간 날이었다. 잘 놀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밤 잠들기 전 아들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M집에 놀러 갔던 날, 갑자기 M이 자기 누나에게, 아이가 누나 물건을 몰래 가져간 것 같다고 말해 M과 M누나가 아이를 맨 끝방으로 데려가 주머니를 뒤졌다는 것이다. 빈 주머니를 보면서도 사과조차 하지 않은 M과 그의 누나. 그렇게 친한 친구에게 느낀 배신감(아직 그게 뭔지 모를 나이였으므로)을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는 그저 소화시키지 못한 고기를 뱉어내듯 꾸역꾸역 이야기를 토해내었다. 아이에겐, 혼란, 그 자체이지 않았을까.


이후에도 M이 누나와 함께 권력을 휘두르는 형태의 사소한 말썽들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M의 누나 없이 M만을 집으로 초대했고, 놀이터에서도 M과 M누나가 함께 난센스를 시전 하는 즉시 '난 집에 갈게, 너랑 노는 거 지금은 재미없어'하고 귀가했다.


M이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자 자기도 파티에 가고 싶었던 M의 누나는, '아, 그날 M이랑 진짜 중요하게 하기로 한 일이 있었는데'라는 말로 초대하는 사람을 무안하고 미안하게 했다. 하지만 M의 엄마에게 확인받기로 그런 사실은 없었다. 딸이 이상한 말을 하고 다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단 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M의 엄마는 결국 파티 주최자 앞에 딸을 데려와 '사실은 내 딸이 중요한 이라고 말한 건 자기 동생이 아니라 친한 친구와의 약속이었대, 그렇지, 딸?'라고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딸에게 예스를 강요했다. 그렇게 딸의 거짓말을 지지하면서라도 지켜야 했던 건 딸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체면이었다.


아이들은 실수하며 배운다. 실수를 통해 제대로 배우려면 그 과정을 잘 보여주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 M의 엄마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이의 아빠가 온라인 강의를 하는 날, 그날도 M은 학교 앞에서 아이를 기다렸다가 우리 집으로 함께 . 이해를 시켜주면 지시 사항을 잘 따르는 아이들이었기에 아이 아빠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고 평소처럼 간식을 준 후 수영 갈 채비를 했다. M의 누나가 불쑥 들이닥칠 것을 대비해 M의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온라인 수업 중이니 M의 누나가 벨을 누르거나 와서 소란스럽게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M의 엄마로부터 알았다는 대답을 들은 후, 닌텐도를 시작한 아이들을 뒤로하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묻는다.

"M엄마에게 나 강의 중이라고 얘기했다고 했지?"

M의 누나가 기어이 벨을 누르고 동생 이름을 불러대며 남편의 강의를 중단시켰고 그렇게 한바탕 소란 후에 M은 누나와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M의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묻자 '깜빡했어'란 답이 돌아왔다.


그래, 깜빡했다니 어쩌겠어. 하지만,


그날 밤, M의 엄마는 내게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평소에 단문을 나열하는 그녀가 얼마나 고심하고, 고치고 또 고쳐가며 작문을 했을지 눈에 선했다. 요점은, 앞으로는 내가 꼭 집에 있을 때만 M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아이들을 지켜보 사람이 없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내가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 때만 자신의 아들이 방문하도록 아이에게 말해두었다고 했다. 딸에게 간단한 메시지조차 전달 못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해서, 나에게로 화살을 돌리고자 고안해 낸 논리였다. '네가 에게 주의를 전달하는 걸 깜빡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오늘 일과는 상관없이 앞으로도 M은 언제든 우리 집에 놀러 올 수 있어.'라는 마지막 카톡을 끝으로,


그렇게 나는 그녀를 나의 카톡과 페이스북에서 지우고자 결심했다. 그녀와의 대화는 더 이상 무의미했다.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아들이 보고 싶어 하는 M과 S를 초대했다. S의 엄마는 내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 중 한 명인데,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어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M의 엄마를 개입시키지 않고 M을 데려와 주었다. 오랜만에 만나 신나게 노는 세 아이들을 보니 나까지 행복해졌다.


내가 덜 예민한 사람이어서 M의 엄마를 잘 참아줄 수 있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생각해 본다. 아이와 잘 노는 M은 여전히 귀엽고 동조적이고 활달하다. 몇 년 후 M이 커서 친구를 만나러 혼자 영국으로 놀러 온다면, 지난 2년간 그랬듯이 정성껏 대접해 주고 잘 보살펴 줄 것이다. 하지만, M의 엄마와 그 엄마가 주는 상처를 고스란히 받고 커서 자신도 모르게 친구에게 가스라이팅을 하기 시작한 M의 누나는,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내겐 너무 어렵고 버거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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