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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Aug 29. 2023

주차 못하는 남편

예민하다는 건, 감각을 통해 한꺼번에 많은 정보가 들어온다는 뜻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감각 기관들을 통해 정보가 일괄적으로 들어오고, 대부분 빠르게 처리된다. 속도도 빠르고 판단도 정확한 편이다. 그렇게, 예민해서 잘하는 것들이 생긴다.


난 예민해서 운전을 잘한다.


물론 운전한 지 25년 정도 되었으니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일수도 있지만, 나보다 오래 운전한 남편이나 운전한 지 50년이 넘으신 시부모님을 보면 운전을 오래 했다고 잘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내가 사는 북웨일스에는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가 거의 없다. 대부분 roundabout이라고 불리는 회전 교차로이고, 그곳에 타이밍 맞춰 들어가는 건 눈치게임에 가깝다. 인디케이션을 주는 차도 있고 아닌 차도 있기 때문에 자기 차례에 눈치껏 오른쪽에서 오는 차에 위협적이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빠르게 진입해야 한다.


내 앞에서 움직이는 차, 내가 갈 방향(몇 번째 exit인지), 오른쪽에서 진입하는 차들, 이 모두를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빠른 판단을 내려 스무스하게 진입해야 하는데, 감각이 예민하지 않은 시부모님과 남편은 시야도 좁고 정보 처리가 느려 한참을 망설이거나 몇 번씩 차를 꿀렁꿀렁 멈추었다 가기를 반복하며 겨우 진입한다. 그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늘 생각한다. 선탠이 안된 차량이 원망스럽다... 그래서 일단 임시방편으로 선글라스를 다.


남편과 연애할 당시 런던에 살았던 우리는 시댁에 자주 놀러 갔었다. 나를 관광객으로 대접해 주시던 시부모님은, 다음 어디를 가야 할지 매일 밤 남편과 긴 토론을 하셨다. 토론의 목적은 대부분, '주차가 힘든 곳인데 그걸 감수하고라도 가는 게 나은가'를 따져보기 위함이었다. 그때부터 이상하긴 했었다. 도착해 보면  어느 부분에서 주차가 힘들다고 열띤 토론을 벌인 걸까, 의아한 점 투성이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심하게 콩깍지가 씌어 뭘 하든 좋았던 시절이었다.


아이가 4살 되던 해, 시부모님과 스페인 이비자 섬으로 2주간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리조트에만 있기 지루했던 우리는 차를 렌트해서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남편이 운전대를 잡으며 '아, 왼쪽에 앉으니 어색한데?' 했다. 시골 논길처럼 난간이 없는 건조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데 차가 자꾸만 오른쪽 가장자리로 가까워졌다. 너무 오른쪽으로 붙었어,라고 내가 얘기하는 순간 오른쪽 앞바퀴가 덜컹 밑으로 기울어졌고 남편이 급하게 핸들을 꺾어 올렸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모래바람이 일었다. 아이가 괜찮은지 확인한 남편이 '정말 미안해'라고 모두에게 사과했다. 긍정의 여왕이신 어머님은, '네가 운전을 잘해서 우리 모두를 살렸구나'하셨다. 조용히 룸미러로 남편을 쳐다보니 어머님 말씀에 민망해진 그가 내 눈을 피했다.


남편은 주차를 못한다.


그래도 늘 운전을 하고 싶어 한다. 시내에 나갈 일이 있으면 본인이 항상 운전대를 잡는다. 운전을 하든 조수석에 앉아 있든 나는 초식동물처럼 사방팔방을 다 보기 때문에 주차 자리도 금방 찾는다. 시내에는 노상 주차장이 많아서 거의 평행주차를 해야 하는데, 공간이 보이는 즉시 이미 앞 뒤 차와의 간격을 보고 어디쯤 세웠다 들어가야 할지 계산이 선다. 제법 타이트 해도 수정 없이 한 번에 들어가는 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남편은 다르다. 수없이 많은 주차자리를 지나치고 지나쳐, 뒤에서 기다리는 차가 없는 가장 넓고 한적한 곳을 찾아 주차를 시도한다. 그렇게 찾은 자리. 딱 봐도 여유가 있어 우리가 조금만 바짝 대면 뒤로 캐스퍼 한대는 족히 들어갈 만큼 넓다. 일단 나 먼저 내릴게, 하고 선글라스를 쓴 후 하차했다. 멀리 서 있으려는 내 마음을 눈치챈 듯 남편은 기다렸단 듯이 창문을 활짝 내리고 '앞에 괜찮아? 패이브먼트에서 얼마나 가까워?' 폭풍질문을 해댄다. 10cm씩 움직이며 계속 같은 질문을 하는 남편에게, '앞에 사람이 누워도 될 정도로 공간이 많아'라고 소리치자 지나가던 중년 커플이 웃는다. 벤치에 앉아 지팡이에 두 손을 모으고 쉬고 계시던 은발의 고운 할머님이 '걱정 마, 충분해'라고 남편을 응원해 주신다. 세계에서 제일 긴 트레일러를 좁은 공간에 주차해야 하는 험난한 미션이라도 수행하듯 모든 실질적, 정신적 도움을 다 받고 난 후에야 겨우 주차에 성공한 남편. 후방카메라에 앞뒤 센서도 있는데 왜... 왜 그럴까.


결국 비뚤게 차를 댔다. 주차선과 평행이 아닌 아주 불편한 모양새로. 큰일을 마친 듯 홀가분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는 남편을 보니 '내가 다시 대면 안될까?...'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내가 어디까지 나를 내려놓아야 하나.


아빠만큼 안 예민한 아들은 그 난리가 났는데도 느긋하게 뒷좌석 앉아 오디오북을 듣다가 차가 한동안 움직이지 않자  '주차 끝났어요?'하고 묻는다. 하긴 10cm씩 백번을 수정했으니 끝이 난 건지 또 움직일 건지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나에게는 차마 물을 수 없어 아들에게 '아빠 주차 잘했지?'라고 물으며 남편이 해맑게 웃자 아빠를 향해 엄지 척을 들어 보이는 아들.


아, 저렇게 되지 말자, 이 예민함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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